[고두현의 문화살롱] 원본 없는 사회의 비극
“칸트 책에 정말 그런 구절이 있다고? 국내 전문가한테 얘기했더니 처음 듣는 거라는데? 괜히 나만 바보 됐잖아….” 친구의 볼멘소리를 들으면서 다시 책을 들췄다. 분명히 있다. 번역본을 읽는 내 눈에도 보이는데 평생 공부했다는 전공자에겐 안 보인다니 기가 막힌다.

칸트의 《영구평화론》 중 “무릇 국가권력이 지배하는 모든 힘 가운데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돈”이라는 대목이다. 그가 71세 때인 1795년에 쓴 책의 핵심 명제가 바로 이 구절에 있다. 전쟁을 방지하고 영구평화를 실현하는 데에는 국가 간의 우호통상과 교역확대라는 상업정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국제연맹론의 싹이 텄다. “맥도날드가 진출한 나라끼리 전쟁을 벌인 적은 없다”는 이론의 뿌리이기도 하다.

전문가도 원전(原典)·팩트 확인 안해

원전을 공부하는 전공자가 이 정도라면 심각하다. 혹시나 눈에 들어오는 대목만 읽고 나머지는 별스럽지 않은 것으로 치부했던 것일까. 《순수이성비판》이나 《도덕형이상학》 등의 고매한 철학이 아니라 ‘돈’이라는 세속 용어가 튀어나오니 애써 건너뛰었을까.

원본을 꼼꼼히 읽는 것만큼 중요한 게 또 있다. 정본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일이다. 엊그제 나온 《열하일기》 판본 비교연구 결과 친필 초고본과 이후 필사본이 서로 다르다는 게 밝혀졌다. 초고본에는 기생충을 방지하려고 닭 날개 사이의 털을 뽑는 현지 풍습이 생생히 묘사돼 있지만 수정본에선 이를 먹으로 지운 흔적이 발견됐다. 청나라 소녀가 이쁘다는 대목도 빠졌고 천주교 관련 내용도 삭제됐다. 정조의 문체반정, 천주교 박해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40종에 가까운 각처 소장본을 비교해 정본화한다니 다행스런 일이다.

인터넷 시대의 부작용도 문제다. 시인들은 정체불명의 시가 자기 이름으로 떠도는 걸 보고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하소연한다. 시어나 행갈이를 제멋대로 바꾼 건 예사다. 몇 줄을 통째로 빼거나 없는 내용을 덧붙인 것도 많다. 제목이 바뀐 정도는 애교에 속한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긁지 말고 제발 시집에서 원문을 찾아 읽어 달라”는 호소까지 나온다.

'악마의 편집'에 가짜뉴스까지

미디어의 폐해는 어떤가. 구체적인 법안 내용이나 검찰의 수사 발표, 법원 판결을 원문 그대로 다 읽고 분석한 뒤에 보도해야 하는데 입맛대로 발췌·인용·재해석하기 일쑤다. 정치·사회적 선언문과 성명서처럼 색깔이 있는 경우는 더하다.

일상생활과 직결되는 계약서마저 읽지 않는다. 최근의 자살보험금 관련 소동도 그렇다. 약관이 실수로 들어갔다는 둥, 초안자가 외국 걸 그대로 복사했다가 생긴 해프닝이라는 둥 코미디가 따로 없다.

이런 사회에서는 ‘가짜 뉴스’가 판친다. 없는 얘길 지어내는 것보다 더 나쁜 건 ‘악마의 편집’이다. 단장취의(斷章取義)란 시문 일부를 따 숨은 맥락을 살리는 묘미인데, 이걸 악용해 개인과 사회를 병들게 하면 독약과 다름없다. 요즘엔 학생들을 상대로 한 ‘가짜 독서’까지 등장했다. 대학 수시전형용으로 책을 요약하거나 독후감을 대필해준다니,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우리 사회 전체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고두현 논설위원·시인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