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계열사 사장들이 15일 서울 서초동 삼성 사옥에서 ‘수요 사장단 회의’를 마치고 로비로 빠져나오고 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삼성그룹 계열사 사장들이 15일 서울 서초동 삼성 사옥에서 ‘수요 사장단 회의’를 마치고 로비로 빠져나오고 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특검 주장대로라면 2014년 이후 삼성의 주요 경영행위는 모두 최순실의 영향력 아래 이뤄졌다는 얘기다. 말이 안 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2차 구속영장을 살펴본 삼성 고위관계자는 15일 이같이 말했다. 2014년 이후 삼성의 승계 및 사업구조 개편과 관련해 발생한 대부분의 현안은 최순실 씨에 대한 지원을 통해 해결했다는 것이 구속영장의 주요 요지다. 이 부회장과 박근혜 대통령의 독대(2015년 7월25일)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2015년 7월17일) 이후 이뤄져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이 1차 구속영장 기각의 원인이 된 게 이유다. 특검은 시간상 선후관계가 맞는 모든 사안에 ‘최순실 잣대’를 들이댔다.

이 과정에서 특검은 삼성 지배구조를 비판해온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를 참고인으로 불러 도움을 받았다. 혐의와 관련된 특검의 논점이 대부분 김 교수가 과거 주장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특검이 새로운 증거라며 언론에 흘리는 것들은 압수수색 과정에서 확보했지만 의미가 모호한 관계자들의 메모밖에 없다. “그렇게 떠들썩하게 수사하고 새로 밝힌 게 뭐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삼성·특검 '운명의 하루'] 특검 "명마 블라디미르 삼성이 사줘"…삼성 "최순실이 제안했지만 거절"
① 명마 ‘블라디미르’, 삼성이 사줬나

특검은 삼성이 최순실 사태가 수면 위로 떠오른 이후에 정유라 씨에게 명마 블라디미르를 사줬다고 보고 있다. 그 이전에 삼성이 정씨에게 지원했던 말 비타나V의 매각 대금 일부가 삼성에 입금되지 않았는데 이 돈이 블라디미르 구입에 쓰였을 거라는 주장이다. 박상진 삼성전자 대외협력담당 사장이 지난해 9월 독일에서 지원 내용을 합의한 것으로 보이는 메모도 발견했다고 밝혔다.

삼성은 최씨가 블라디미르 구입을 위한 지원을 요구해와 박 사장이 만난 것은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박 사장은 이 자리에서 제안을 뿌리쳤고 추가 지원도 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특검이 확보한 박 사장의 메모에 쓰인 ‘정권 교체 시 검찰 수사 가능성’ ‘삼성 폭발적’ 등은 지원 중단의 근거라고 밝히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 공개한 양자 간 협약서 서식은 최씨가 만들어 사인을 요구했지만 박 사장이 거부한 것이라고 삼성은 해명했다. 비타나V 매각 대금이 모두 들어오지 않은 것에 대해 삼성 관계자는 “여론에 밀려 말을 급하게 파는 과정에서 매각 대금을 분할해 받기로 계약이 이뤄졌다”며 “그 때문에 돈의 일부가 아직 입금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② 공정위가 삼성물산 주식 처분 줄여줬나

특검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후 삼성 계열사들이 통합 삼성물산의 주식을 매각하는 과정에서도 삼성이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보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 압수수색 과정에서 발견한 메모가 근거다. 정재찬 공정위 위원장은 삼성SDI와 삼성전기가 500만주씩 모두 1000만주를 처분하도록 권고했는데 며칠 뒤 김학현 공정위 부위원장이 삼성SDI의 500만주만 처분하도록 뒤집었다는 것이다. 매각 규모가 줄어들자 이 부회장 등이 다시 사들여 삼성물산 지분율을 유지했다는 주장이다.

삼성은 로비를 벌일 이유 자체가 없었다는 태도다. 합병 직후 이 부회장과 특수관계인 등 삼성이 보유한 삼성물산 지분은 39.85%였다. 우호지분인 KCC 지분 8.97%를 합치면 절반에 육박한다. 500만주(2.64%)를 더 팔고, 덜 팔아봐야 지배력에 대한 영향이 미미하다는 얘기다. 삼성과 공정위 관계자가 여덟 차례 만난 것을 특검이 문제 삼은 것에도 삼성 측은 “새로운 규제가 적용되는 과정에서 통상 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삼성 관계자는 “합병으로 순환출자 고리가 줄어든 만큼 지분을 매각할 필요가 없다는 게 삼성의 입장이었으며 매각 규모를 줄여야 한다는 요구 자체가 없었다”고 말했다. 공정위 안팎에선 “공식 발표 전에 정책의 세부적인 사항이 내부에서 입장이 조정되는 건 으레 있는 일”이라는 말도 나온다.

③ 삼성바이오로직스는 특혜 상장?

구속영장 내용 중 삼성과 관련 업계에서 가장 납득하기 힘든 것은 삼성바이오로직스가 금융위원회의 영향력 아래 특혜 상장했다는 것이다. 영업이익을 내지 못한 기업이라도 상장할 수 있도록 유가증권시장 상장 규정이 2015년 11월 개정됐는데 1년 뒤 상장한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수혜를 봤다는 것이다.

자본시장 관계자는 “상장 규정 개정은 2015년 초부터 추진됐는데 당시엔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상장 논의 자체가 없었다”며 “미국 나스닥에 상장하면 훨씬 더 이득이 큰 회사를 금융위 관계자까지 나서 국내 상장으로 돌려세운 건 기업공개(IPO)업계 종사자라면 모두 아는 일”이라고 말했다.

자회사인 바이오에피스의 가치를 높이는 방식으로 공모가를 부풀렸다는 정치권 일각의 주장에는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입장을 내놨다. 2015년 10월부터 3개월 사이에 바이오에피스 제품의 판매 승인 3건이 이뤄져 기업 가치가 크게 뛰면서 회계기준인 IFRS에 맞춰 재평가해야 했다는 설명이다.

④ 금융지주사 만들려 청와대에 로비?

특검은 또 삼성생명을 중심으로 금융지주사를 세우기 위해 이 부회장이 박 대통령에게 관련 규제 완화를 직접 요청했다고 보고 있다. 지난해 2월 이 부회장과 박 대통령의 독대 과정에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금융지주회사, 글로벌 금융, 은산분리’ 세 단어를 메모한 것이 단서다.

삼성은 확보한 메모 내용만으로 혐의 여부를 규정하는 특검의 수사 방식이 빚은 대표적인 오해로 보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금융위 관계자도 특검에서 증언했듯이 금융지주사는 정부의 반대로 접은 지 오래된 사안”이라며 “메모된 수백 개 단어 중 세 개만으로 이 부회장이 로비를 했다고 판단하는 건 비약”이라고 말했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