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끝서 피어난 무릉도원…"중국 수채화 한류 도전"
2002년 늦은 봄이었다. 한국 수채화의 대가 정우범 화백(70·사진)은 터키 수도 앙카라로 무작정 스케치 여행을 떠났다. 케말파샤 광장 주변은 방금 피어난 야생화로 울긋불긋 꽃천지를 이뤘다. “바로 이거다!” 그는 탄성을 지르며 곧바로 감각과 온 신경을 모아 스케치했다. 귀국 즉시 광주 작업실을 서울 연희동으로 옮기고 그때의 감흥을 화폭에 옮겼다. 수채화 물감으로 버무린 지상낙원 ‘판타지아’는 이렇게 태어났다.

정 화백의 ‘판타지아’ 시리즈가 무릉도원의 본고장 중국에 진출했다. 상하이 인근 우시 피닉스예술궁전미술관에서 지난 7일 개막해 오는 3월11일까지 이어지는 회고전을 통해서다. 피닉스예술궁전미술관은 중국 최대 미술 재료 생산 및 유통기업인 펑황그룹이 운영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한반도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 이후 ‘한류’가 큰 타격을 받고 있는 시점에서 중국 기업 계열 미술관이 한국 작가를 초대해 전시회 비용을 전액 지원한 것은 이례적이다.

정 화백은 ‘환상곡’을 주제로 유럽과 미국, 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채집한 야생화를 반추상 기법으로 작업한 ‘판타지아’ 시리즈를 비롯해 1980~1990년대 작업한 반구상 풍경화와 정물화 등 80여점을 풀어놨다. 전시회를 위해 중국에 갔다가 지난 28일 일시 귀국한 정 화백은 “현대 작가들이 뉴욕 첼시에 가는 것 못지않게 한국 수채화가로서 이번 중국 전시가 지니는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다.

중국 상하이 인근 우시 피닉스예술궁전미술관에 전시된 정우범 화백의 ‘판타지아’.
중국 상하이 인근 우시 피닉스예술궁전미술관에 전시된 정우범 화백의 ‘판타지아’.
정 화백의 브랜드가 된 ‘판타지아’ 시리즈는 국화를 비롯해 장미, 팬지, 양귀비, 피튜니아 등 다양한 야생화를 다룬다. 물감의 번짐과 중첩 속에 꽃의 형태가 드러난 작품들이다. 꽃의 크고 작음이나 경중을 구분하지 않는 그의 작품에는 그 어떤 작은 꽃이라도 차별받지 않고 귀중하다는, 이상향에 대한 미학이 흐른다. 거대한 꽃무더기를 통해 무심(無心), 힐링, 평화, 행복을 풀어내겠다는 굳은 의지도 담겨 있다.

조선대 교육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한 뒤 서울과 광주에서 줄곧 활동해온 정 화백은 수용성 물감과 아크릴, 목화솜으로 만든 종이, 표현 양식의 과감한 실험과 도전으로 수채화의 독보적 경지를 개척했다. 작년 5월에는 타이베이 쑨원기념관에서 개인전을 열어 대만 화단에서도 주목받았다.

정 화백이 평생 수채화를 고집해온 까닭은 뭘까. 기름기로 인해 끈적끈적한 유화 물감이 동물성 맛이라면 수채 물감은 담백한 식물성 음식에 가깝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종종 수채 물감을 즐겨 쓰는 작가를 채식주의자와 비교한다”며 “그만큼 수채화는 자연친화적”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은 수묵화와 채색화가 엄격하게 분리돼 있는데 전통적인 수묵화의 발묵(發墨)과 파묵(破墨)을 현대적인 수채화에 응용한 점에서 중국 화단의 각별한 평가를 받았다”고 그곳 분위기를 전했다.

정 화백의 작품은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해내는 전통 수채화와는 거리가 멀다. 사물의 외형적 묘사보다는 대상에서 직관으로 얻어지는 기운생동한 심상의 세계를 감성적인 색채로 재창조한다. 그의 화면이 반구상성을 띠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채색화법에 대한 중국 화단의 좋은 평가를 받은 정 화백은 “우리의 현대적 수채화도 충분히 한류를 일으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 전시회는 후배 수채화가들의 중국 무대 진출 가능성을 열어준 자리입니다. 앞으로 중국의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수평적인 교류를 해나갈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