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엔 우익진영서도 확산일로
정치 잊고 나날의 생업에 매진하자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
비관론은 원래 좌익의 전매특허다. 루소에서부터 마르크스를 거쳐 현대 사회주의와, 작금의 환경 좌파에 이르기까지, 좌익은 인간의 문명이 종말을 향해 달리고 있을 뿐이라는 역사관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나 도처에서 불평등에 시달리고 있다는 루소의 그럴싸한 절규는 한국에서는 갈수록 사실의 진술처럼 둔갑해 맹위를 떨친다. 좌익적 사고하에서 세계가, 문명이, 경제가, 우리의 삶이 좋아졌던 적은 없다. 게다가 무언가의 변곡점에 다가설수록 비관론은 확산된다. 연초 바로 이 칼럼에서 ‘앞으로 2, 3년 안에 한국 경제가 망한다’며 전국을 순회했던 1980년대 Y교수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2016년 1월6일자), 지금도 그런 자칭 지식인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얄팍한 논리로 학생들의 분노를 선동하는 강단좌파는 우후죽순이다. 실제로 모교수는 ‘왜 분노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책을 쓰기도 했다. 이 책은 어처구니없는 통계 오독을 기초로 헬조선을 선동하는 것이어서 그 자체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언젠가 그 오류들을 지적해 줄 생각이다.) 그렇게 최대한의 인내심으로 반지성을 참아내야 한다. 혁명을 요구하는 어떤 대선후보 캠프에 대학교수 1000명이 운집했다는 사실은 이 시대 대학교수의 값어치를 저울질해준다.
경제하려는 의지가 약화되는 것은 사회 전체가 좌경화, 주자학화하고 있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한국 사회주의는 조선 주자학의 현대적 변용이라 해도 무방하다. “재벌에 좋을 뿐인 그런 경제성장은 필요없다… 우리에게 좋은 일자리를 달라”는 모순적 절규가 광화문광장을 메우는 것도 인과관계에 대한 무지의 결과다. 사자와 양떼가 어울려 풀을 뜯는 공원을 꿈꾸는 어린아이의 꿈이다. 자본주의를 공격하고 재벌을 비판하는 언어들은 너무도 천동설적이어서 일일이 대꾸할 수 없다. 그러나 광장의 구호소리가 높아질수록 기업들의 사기는 떨어진다.
지난 주말에는 ‘재벌도 탄핵!’ 소리가 광장을 지배했다. 일하는 사람은 하나인데 때려잡자는 감시 그룹은 너무나 많다. 경찰 검찰 감사원 지자체 그리고 행정 각부가 모두 완장을 차고 행세하는, 다시 말해 기업을 뜯어먹는 감시 기구들이다. 여기에 국회와 국회의원 각인들, 심지어 기업을 비판하면 돈이 된다는 것을 잘 아는 시민단체와 언론까지 적의의 눈길을 번득인다. 광장이 목청을 높일수록 “기업 고만하자”는 은밀한 중얼거림이 확산된다. 착하고, 돈 잘 벌고, 고용도 많이 하는 그런 기업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불가능성 정리라 불러도 좋다.
87체제의 부작용이 1997년의 외환위기였다는 사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노동비용이 급증하는 10년이면 금융위기를 부르기에 충분하다. 좌익은 저주의 선동질이고, 우익은 “경제가 결딴난다”는 절규를 내지른다. 좌·우가 경제비관론을 경쟁하는 꼴이다. 그러나 어른까지 생업을 포기할 수는 없다. 아이들이 짓까불어도 부모는 오늘도 밥을 만들어야 한다. 내년에도 목표를 한껏 높게 잡고 매진해가자.
지난 주말 시위가 격돌하는 광화문 안국동 일대를 돌아봤다. 마침 보수집회가 열리는 안국동 도로변에는 탄핵무효! 종북척결! 손피켓과 태극기를 파는 노점상이 일찌감치 좌판을 열고 부지런히 물건을 팔고 있었다. 그러나 아뿔싸. 몇 시간 후 저녁에 보니 바로 그 노점상이 이번에는 박근혜 하야! 황교안 퇴진! 등의 손피켓을 열심히 팔고 있을 뿐이었다. 아, 너 생업의 위대함이여. 부모 잘 만난 광장의 시위꾼들이 먹고사는 엄중함을 알기는 할 것인지.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