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5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 대한 욕설로 화제의 중심에 선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18일 나흘간 일정으로 중국을 국빈 방문한다.

필리핀은 그동안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대표적인 ‘친미(親美)’ 국가로 분류돼왔다. 남중국해 영유권을 놓고 중국과는 대립각을 세웠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기류가 급전했다. 그는 올해 6월 취임 이후 ‘탈미친중(脫美親中)’ 조짐을 보였다. 이번 방중을 통해 중국과 필리핀 간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면 미국의 대중(對中) 봉쇄전략에 구멍이 뚫린다.
◆필리핀, 親中으로 돌아서나

두테르테 대통령은 방중 기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 양국 관계 개선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그는 지난 16일 필리핀 현지 언론과의 기자회견에서 “이번 방중으로 필리핀과의 관계 개선에 대한 중국 지도부의 인식이 바뀔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미국과 중국의 주요 언론은 그의 방중에 대해 상반된 평가를 내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두테르테가 ‘탈미친중’이란 도박 주사위를 던졌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반면 중국 환구시보는 “두테르테의 방중으로 중국과 필리핀 양국 관계가 새로운 전환점에 섰다”며 기대를 보였다.

양국 언론이 상반된 목소리를 내는 것은 필리핀이 갖는 전략적 중요성과 두테르테 대통령이 취임 이후 보여온 행보 때문이다. 필리핀은 2012년 중국이 남중국해 스카보러 암초를 무단 점유한 이후 중국과 첨예한 영유권 분쟁을 벌여왔다. 남중국해 문제를 네덜란드 상설중재재판소에 제소해 승소하기도 했다.

‘아시아 재균형’ 전략을 기치로 내걸고 아시아 지역 내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해온 미국 입장에서 필리핀은 지리적으로 활용 가치가 매우 높은 동맹국이었다. 두테르테의 전임인 베니그노 아키노 전 대통령까지는 그랬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달랐다. 그는 취임 이후 틈만 나면 중국과의 관계 회복을 원한다는 뜻을 밝혔다. 필리핀 정부가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마약과의 전쟁에 오바마 대통령이 인권침해를 우려하자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됐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양국 정상회담이 취소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미국과의 합동 군사훈련 중단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어 중국과의 관계 회복에 전력투구할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中, 선물 보따리 준비 중

외교 전문가들은 필리핀과 중국 정상이 경제협력을 확대하는 방안을 집중 논의할 것으로 내다봤다. 2012년을 기점으로 경제성장률이 2%대로 내려앉은 필리핀 입장에서는 낙후된 사회인프라 개선을 위한 투자유치와 외부 지원이 절실하다. 중국으로선 대대적인 투자와 지원으로 필리핀을 미국으로부터 확실하게 떼어놓을 기회다.

이번 방중단에 레이먼드 앙 산미구엘맥주 사장, 필리핀 최대 갑부 헨리시의 아들 한스시 SM인베스트먼트 회장 등 필리핀을 대표하는 기업인 400여명을 포함시킨 대목은 경제협력 강화를 노린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자오젠화 주필리핀 중국대사도 최근 필리핀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방중 기간 최소 10여개의 경제협력 협정이 체결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외교가에선 중국이 주도해 설립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필리핀 철도 및 발전소 건설 투자, 필리핀산 바나나 수입금지 해제, 장기 저리차관 제공, 필리핀 여행 경계령 해제 등을 중국의 주요 선물 리스트로 예상하고 있다.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는 중국이 스카보러 암초에서 필리핀 어민의 어업권을 보장하고, 양국이 남중국해 지하자원 공동탐사·공동이용에 관한 협정도 맺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베이징=김동윤 특파원 oasis9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