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 패션업체인 현우인터내셔날이 호주머니가 가벼운 여대생 등을 겨냥해 ‘르샵’ 브랜드를 내놓은 건 2006년이었다.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높은 르샵에 20~30대 여성들은 열광했다. 롯데 현대 신세계 등 3대 백화점은 여성복 매장에서 가장 목 좋은 곳을 르샵에 내줬다. 2011년 매출 1000억원 고지를 넘어선 현우의 기세가 꺾인 건 이듬해부터였다. 자라 유니클로 H&M 등 ‘원조 패스트패션’ 브랜드들의 한국시장 상륙과 이즈음부터 시작된 소비침체가 맞물린 여파였다. 그렇게 4년여를 힘겹게 버티던 현우는 결국 지난 6월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법정관리 기업 1150개] 조선·건설서 전자·패션으로 급속 확산…"올겨울이 더 무섭다"
◆도미노식 법정관리 행렬

한계에 몰려 ‘최후의 선택’을 결심한 기업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중소기업이 대부분이지만 한진해운 STX조선해양 등 대기업도 법정관리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무리한 투자’나 ‘경영 판단 착오’ 등 시장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해 쓰러진 기업이 대부분이다. 납품하던 대기업이 무너지면서 판로를 못 찾은 중소기업이 모기업을 따라 회생절차를 신청하는 ‘도미노 법정관리’ 사례도 많다.

업종별로는 소비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조선 해운 건설 등 글로벌 공급 과잉 여파로 어려움을 겪는 산업에서 전자·통신, 유통·패션, 식음료 등으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최근 6개월(3~8월) 동안 서울중앙지방법원 파산부에 접수된 법정관리 신청기업 162개를 분석한 결과 전자·통신(46개)과 유통·패션(37개)이 건설·건축(27개), 금속·철강(8개), 조선·해운(5개)을 압도했다. “업체 수가 많은 데다 트렌드 변화가 워낙 빨라 잠깐 한눈을 팔면 뒤처지기 때문”(구본용 에버베스트파트너스 대표)이란 설명이다.

지난해 컨소시엄을 구성해 팬택을 공동 인수한 옵티스가 대표적인 예다. 음악을 듣는 방식이 CD에서 MP3, 다시 스트리밍(음원을 저장하지 않고 음원 사이트에서 바로 내려받는 방식)으로 빠르게 바뀌면서 CD 등에 사용되는 광학디스크드라이브(ODD) 판로가 막힌 게 법정관리로 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유행에 민감한 식품·프랜차이즈 업종도 예외는 아니다. 유명 맥주 프랜차이즈 ‘와바(WABAR)’를 운영하는 인토외식산업과 바비큐 전문 프랜차이즈 ‘옛골토성’ 운영업체인 토성에프시도 올 들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美 금리 인상 시 더 빠르게 늘듯

전문가들은 법정관리 신청 기업이 한층 빠른 속도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경기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고 있는 데다 그나마 있는 소비수요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검증된 일부 기업’에 몰리고 있어서다.

금융권에서는 향후 5년 내 법정관리 기업이 2000개까지 불어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지금 같은 추세라면 기업 대출금 만기가 몰려 있는 올 연말부터 한계기업의 법정관리 신청이 급증할 가능성이 있다”며 “특히 미국의 금리 인상 등으로 인해 국내 금리가 오르기 시작하면 저금리로 연명해온 기업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채권단이 주도하는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이 제 역할을 못하는 것도 한계기업의 법정관리행(行)을 부추길 것으로 예상된다. 특정 기업에 대해 채권단이 워크아웃을 결정하면 기존 빚 상환을 유예해주는 동시에 필요할 경우 출자전환, 신규 자금 대출 등 추가 지원도 추진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부적절한 대출’이나 ‘특혜 의혹’ 논란이 불거지자 채권단이 워크아웃 자체를 기피하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대우조선해양 부실 워크아웃 논란이 제기되면서 워크아웃 자체를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가 금융권에 형성돼 있다”며 “부도 위기에 몰린 기업으로선 워크아웃이 안 되면 법정관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태호/오상헌 기자 highk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