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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일국 "뮤지컬 배우 신고합니다" 최정원 "20년 만에 주연 맡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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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일 개막 '브로드웨이 42번가'서 찰떡궁합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서

    송일국, 천재 연출가 마쉬역
    최정원은 도로시 브록역 열연
    최정원(좌)·송일국(우)
    최정원(좌)·송일국(우)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는 시골 출신 신출내기 코러스걸 페기 소여가 일약 스타가 되는 과정을 그린다. 스타에 가려 빛을 내지 못하는 수많은 단역 배우의 꿈과 희망 같은 작품이다.

    국내 초연 20주년을 맞아 오는 23일부터 8월28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무대에 오르는 ‘브로드웨이 42번가’에는 소여처럼 꿈을 이룬 두 배우가 등장한다. 뮤지컬 공연에 처음 도전하는 송일국과 1996년 초연 당시 조연인 애니 역을 맡았다가 주인공 도로시 브록 역으로 무대에 서는 최정원이다.

    “제게 뮤지컬 배우는 늘 ‘이룰 수 없는 꿈’이었어요. 뮤지컬 배우에게 필요한 노래와 춤에 영 소질이 없어 마음으로만 간직하고 있었죠. 그런데 꿈의 뮤지컬인 ‘브로드웨이 42번가’에 출연하게 되다니…. 간절히 원하니 정말 꿈은 이루어지네요.”

    TV 드라마에 주로 출연해온 송일국은 장영실(장영실), 무휼(바람의 나라), 주몽(주몽) 역 등을 맡아 반듯하고 묵직한 연기를 선보였다. 최근에는 연기자 대신 ‘삼둥이 아빠’로 더 큰 인기를 얻었다.

    23일 개막하는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
    23일 개막하는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
    그가 처음 도전하는 뮤지컬 배역은 천재 연출가 줄리안 마쉬다. 2014년 송일국이 출연한 연극 ‘나는 너다’를 인상 깊게 본 최정원이 “송일국의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마쉬 역에 딱”이라며 적극 추천했다. 이 작품은 10년 전에 본 공연 팸플릿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로 그에게 애착이 큰 작품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누가 될까 봐 한 달 넘게 보컬 트레이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첫 합동 연습을 했는데, 같은 배역을 맡은 이종혁 씨가 그러는 거예요. ‘형 보컬 트레이닝 좀 받아야겠는데.’ 절망적이었죠. 하하. 공연을 시작할 때쯤이면 들어줄 만한 실력이 돼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그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는 이가 뮤지컬계의 대선배 최정원이다. 최정원에게도 극 중 소여 같은 경험이 있다. 그는 1989년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에서 이름도 없는 ‘아가씨 6번’으로 데뷔했다. 단역 경험밖에 없던 그는 1990년 뮤지컬 ‘가스펠’의 주인공 조엔 조나스 역을 단박에 꿰찼다.

    “사실 제가 꿈도 못 꾸는 배역이었어요. 너무 하고 싶었지만 워낙 쟁쟁한 선배가 많아서 저는 매일 연습실에서 선배들을 지켜보며 혼자 연습했죠. 그런데 공연 개막 9일 전 주인공 배역을 맡은 선배가 갑자기 다쳤어요. 대사를 전부 외운 배우는 저뿐이었죠. 소여에게 일어난 일이 제게도 일어난 거죠.”

    눈을 반짝이며 당시를 회고한 최정원은 “1996년에 처음 이 작품에 출연하면서도 소여는 ‘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며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많은 배우와 가수들에게 송일국 씨가 롤모델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연습실에서 송일국을 지켜본 그는 “앙상블 배우만큼 치열하게 연습하고 노력한다”며 “지금은 힘든 길을 걷고 있지만, 무대에서는 날아다닐 것”이라고 말했다.

    ‘평생 배우로 사는 게 꿈’이라는 송일국이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극중 역할은 능숙한 연출가 마쉬지만 제 심정은 ‘신인 배우’ 소여입니다. 그만큼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드릴게요. 객석 점유율이 90%를 넘으면 커튼콜 때 탭댄스도 추겠습니다. 하하.” 6만~13만원.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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