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50년째 한 선율의 정체를 탐구해 온 한 사람의 기록이다. 처음에 그는 이 선율의 실체를 알아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다 풀지 못한 실마리를 그는 지금까지도 찾아 헤매고 있다.
시작은 이렇다. 반세기 전, 1975년쯤이었을 것이다. 아이는 당시 오후 다섯시 반에 시작되던 정규 TV 방송의 시작 시간을 기다리는 ‘텔레비전 키드’였다. 오늘과 같은 사교육 열풍이 없던 한가로운 시절이었다.
정규방송에 앞서 화면을 기하학적 무늬가 채우는 ‘화면조정 시간’이 있고, 그 뒤 관현악곡 두 곡이 연주됐다. 아마도 ‘오늘의 방송순서 안내’를 시작하는 음악과, 이어 정규방송이 시작됨을 알리는 음악이었을 것이다.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나는 제목을 알고 있었다. 들리브의 발레 음악 ‘코펠리아’ 중 ‘차르다슈’였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제목을 알 길이 없었다. 트럼펫과 현악 합주가 함께하는, 경쾌한 듯, 장엄한 듯도 하고, 당당한 의식의 시작을 알리는 듯한 분위기의 음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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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피기 관현악 모음곡 ‘새’ 중 전주곡 악보 일부. / 필자 제공
[레스피기 관현악 모음곡 '새' 중 전주곡]
그 일은 그렇게 잊히는 듯했다. 의식의 표면 아래로 들어간 그 선율이 다시 표면으로 떠오른 것은 1977년,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여름이었다.
당시 서울에서는 주네스 뮈지칼(Jeunesses Musicales·국제청소년음악협회) 세계 총회가 열렸다. 행사의 일환으로 서울 국립극장에서 ‘세계 청소년 오케스트라’ 콘서트가 열렸다. 국영 TV 방송은 행사와 청소년들이 콘서트를 연습하며 우정을 나누는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영했고, 다큐멘터리가 방송된 뒤에는 국립극장에서 열린 콘서트가 잇따라 화면을 채웠다. 기억이 맞다면,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과 스트라빈스키 ‘불새’ 모음곡이 있었을 것이다. 분명한 일은, 마지막 곡으로 레스피기가 1924년 작곡한 관현악 모음곡 ‘로마의 소나무’가 연주되었다는 것이다. 지휘는 프랑스의 거장 세르주 보도였다.
1악장, ‘빌라 보르게제의 소나무’. 로마의 큰 정원인 빌라 보르게제에서 어린이들이 떠들썩하게 뛰어다니며 노는 모습을 묘사한 악장이다. “음?” 그 선율은, ‘오늘의 방송순서’에서 들었던 그 인상 깊은 선율과 닮아 있었다. C#-D-E-F#-E(반복), 계이름으로는 A장조의 미-파-솔-라-솔(반복)이다. 계이름뿐 아니라 조성과 음이름까지 똑같은 순서로 진행된다.
빌라 보르게제. / 사진 출처. unsplash
레스피기 관현악 모음곡 ‘로마의 소나무’ 1악장 ‘빌라 보르게제의 소나무’ 악보 일부. / 필자 제공
[레스피기 관현악 모음곡 ‘로마의 소나무' ]
그 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의식 너머로 잊히고 말았다. 아마도 ‘로마의 소나무’ 마지막 4악장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가 전해준 감흥이 너무도 깊고 진해서였을 것이다. 표제는 이렇다. “안개 짙은 새벽, 폐허가 된 길가에서 소나무의 대오를 바라본다. 나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군대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쿵쿵거리는 저음의 행진곡 리듬 위에 트럼펫과 호른이 불을 뿜었다. 지휘자 보도는 통상의 지휘 포즈를 잊어버린 듯했다. 좌우로 춤추듯 몸을 저을 뿐이었다.
또 3년이 지났다. 그의 형이 대학에 입학하면서 부모님은 입학 선물로 ‘오디오 컴퍼넌트’ 세트를 사주셨고, 형제는 수많은 LP를 사 모으는 한편 클래식 FM에서 나오는 명곡들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기 바빴다. 어느 휴일 아침, 진행자의 말이 귀를 붙들었다. “레스피기의 관현악 모음곡 ‘새’, 1악장 전주곡, 2악장 암탉, 3악장 비둘기, 4악장 나이팅게일, 5악장 뻐꾸기입니다. 안탈 도라티가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입니다.”
레스피기라? 예전 세르주 보도가 지휘한 ‘로마의 소나무’로 나를 흥분시킨 작곡가 아닌가. 이 곡도 그만큼 흥미로웠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다.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앗,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TV ‘오늘의 방송 시간 안내’에서 들었던, 그토록 제목을 알고 싶었던, 트럼펫과 현악 합주가 함께하는 그 장려하면서도 상쾌한 멜로디가 귓가를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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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놀라운 건, ‘로마의 소나무’를 처음 들었을 때 ‘오늘의 방송 시간 안내 음악과 비슷한데’라고 뚜렷이 인지했던, 그 선율의 작곡가가 바로 같은 레스피기였다는 사실이었다. 과연 레스피기는 같은 동기 또는 음형(音形)을 두 곡에 나란히 사용한 것일까?
레스피기는 작곡가인 동시에 음악학자였다.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교수와 원장을 지냈다. 그는 도서관 깊이 틀어박혀 바로크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 악보에 탐닉했다. 그 수많은 탐구는 그의 창작의 원천이 되었다. 오늘날이라면 그는 ‘정격연주’, ‘원전연주’의 사도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의 청중은 르네상스 음악이나 바로크 음악이 당시의 모습 그대로 귀에 들리는 것을 생경하게 여겼다. 레스피기는 대신 이 음악들에 새로운 살과 옷을 입혔다. ‘옛 춤곡과 아리아’ 모음곡집 세 권을 통해 과거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건반 음악을 현악합주와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해 선보였다.
‘로마의 소나무’보다 4년 뒤인 1928년에 나온 관현악 모음곡 ‘새’도 비슷한 시도의 산물이다. 다섯 악장에 나온 선율들 대부분은 그 원전이 확인된다. 예를 들어 2악장 ‘암탉’은 라모의 클라브생 음악 중 같은 제목의 곡을 편곡한 것이고, 5악장 ‘뻐꾸기’는 베르나르도 파스퀴니의 ‘뻐꾸기 울음소리를 모방한 토카타’에서 왔다.
그런데 이 곡에 나오는 수많은 선율 중 유독 전체 모음곡을 시작하는 전주곡(프렐루디오)의 시작 선율만 그 원전이 명확히 표기되어 있지 않다. ‘오늘의 방송시간 안내’를 알리던 바로 그 음악이다. 이 시작 선율은 단지 ‘파스퀴니의 알레그로’에서 왔다고 되어 있을 뿐이다. 베르나르도 파스퀴니(1637~1710)는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보다 반세기 앞서 이탈리아 하프시코드 음악의 걸작들을 쌓아 올린 작곡가다. 오페라와 오라토리오 등 성악 음악에서도 걸작들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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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방송 시간 안내’를 기다리던 아이는 반세기가 지나 환갑이 되었다. 그 음악은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그를 놀라게 한다. 파스퀴니에 대해 쓰기 위해 자료를 뒤적이던 올 12월 초였다. 그의 눈이 또다시 크게 떠졌다. 자료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로마에서 10년간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한 뒤 그는 1667년부터 보르게제 가문의 후원을 받았다. 조반니 바티스타 보르게제에 이어 후계자인 마르칸토니오 보르게제가 그를 후원했다.”
빌라 보르게제는 보르게제 가문의 영지이자 정원이었다. 레스피기는 ‘로마의 소나무’ 첫 악장인 ‘빌라 보르게제의 소나무’에 ‘새’ 모음곡 중 ‘파스퀴니의 알레그로’를 닮은 선율을 집어넣었다. 두 선율은 우연히 닮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빌라 보르게제를 오가며 활동했던 선배 작곡가 파스퀴니를 이 선율로 오마주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선율이 파스퀴니의 어느 곡에서 나왔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탈리아의 음악학자들이여, 로마의 도서관을 뒤져서 파스퀴니가 쓴 음악들을 다 읽어주십시오. 그 속에 레스피기가 ‘로마의 소나무’와 ‘새’ 모음곡 첫 악장에 사용한 원본 선율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그 선율의 원곡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