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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를 죽인 '금수저' 마네…왜 여성의 벌거벗은 시선을 그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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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e] 이지호의 선 넘는 예술이야기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과열된 경쟁, ‘낙선전’을 탄생시키다
    프랑수아 조제프 하임, <루브르 박물관에서 열린 1824년 살롱 전시회에서 샤를 10세가 출품 예술가들에게 상을 수여하는 모습, 1월 15일, 1825년>, 1827년. 19세기의 ‘살롱’의 규모와 예술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역사화(歷史畵)다. / 이미지. © 루브르박물관
    프랑수아 조제프 하임, <루브르 박물관에서 열린 1824년 살롱 전시회에서 샤를 10세가 출품 예술가들에게 상을 수여하는 모습, 1월 15일, 1825년>, 1827년. 19세기의 ‘살롱’의 규모와 예술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역사화(歷史畵)다. / 이미지. © 루브르박물관
    1863년 파리의 봄, 파리 산업 궁전(Palais de l’Industrie 1855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센강과 상젤리제 사이에 세워진 전시관) 앞 거리는 인파로 북적였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든 이유는 평소와는 다른 독특한 그림 전시회 때문이었는데요. 사람들은 살롱에서 인정받는 영광을 차지한 작품들이 아닌, 심사에서 떨어진 낙선작들을 보러 왔습니다. 이름하여 '낙선전(Salon des Refusés)'. 전시장 안에는 프랑스 최고의 예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Académie des Beaux-Arts) 출신 심사위원들이 떨어뜨린 작품들만을 대거 진열해 놓았습니다. 대회 주최측인 살롱에서 직접 자신들이 거부한 그림들을 모아서 공개 전시를 하다니!

    당대 최고의 심사위원들이 최고의 작품을 뽑는 살롱의 인기는 해가 지날수록 오르고 그에 따라 출품하는 예술가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는데요. 살롱 심사위원들이 선정할 수 있는 작품 수는 한정적이었기에 경쟁은 더 치열해졌고 심사위원들의 평가는 더욱 까다로워졌죠. 그러한 이유로 낙선전이 열린 해 개최된 살롱에서는 무려 5,000여 점이 넘는 출품작 중 3,000여 점 이상이 거부당했답니다. 출품한 작품의 반 이상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한 예술가들은 살롱에 대한 거센 불만을 표출했고, 이 사건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됐답니다. 살롱을 찾아가 낙선작들을 살펴본 황제는 예술가들의 불만을 잠재울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이 그림들을 대중에게 공개해 그들이 직접 보고 평가할 수 있도록 허용하자는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그렇게 낙선전은 살롱에 대한 반발 속에서 탄생하게 됩니다.

    왜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프랑스 대중들을 분노케 했는가?

    낙선전 속 무수히 많은 그림들 속에서 단연 관중들의 이목을 끌고 입에 오르내린 작품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북적이는 벽면 한쪽에 걸린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였는데요, 언뜻 보기에는 그저 남녀 간의 평범한 나들이를 담은 듯한 이 장르화(특정 계층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회화)는 관람객들을 당황하게 했습니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1863년. 도대체 무슨 사연으로 그녀는 옷을 홀딱 벗고 우리를 쳐다보는 것인가? / 이미지. © 오르세 미술관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1863년. 도대체 무슨 사연으로 그녀는 옷을 홀딱 벗고 우리를 쳐다보는 것인가? / 이미지. © 오르세 미술관
    그림 속에서는 잘 차려입은 두 명의 남성이 나무가 우거진 풀밭 위에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들의 복장으로 보아, 프랑스에서 아주 잘사는 부르주아 계급의 멋쟁이(Dandy) 같습니다. 이들이 자연을 즐기며 누워있는 동안 뒤에 한 여인은 속옷만 입은 채 물가에 들어가 자신의 몸을 씻고 있으며, 그들 곁에는 정반대로 옷을 내팽개치고 완전히 벌거벗은 여인이 앉아 있습니다. 요정이나 여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여성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부끄럼이나 수줍음조차 비춰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관람객을 향해 빤히 쳐다보며 “뭘 새삼스럽게 그렇게 쳐다봐?”라고 말하는 듯, 당당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대낮에 풀밭 위 남자들 사이에서 나체로 앉아있는 그녀의 대담한 모습과 그림을 구경하는 이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도발적인 눈빛은 전시장의 많은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몇몇의 구경꾼들은 그림이 너무 외설적이라고 화를 내기도 했답니다.

    낙선전이 개막한 1863년 5월 15일,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전시장 최대의 논쟁거리이자 화제작이 되었습니다. 그림의 여자들을 본 미술 평론가들은 ‘마네가 지금까지 유구한 전통을 가진 서양회화의 위대함을 모조리 무시했다’는 비난을 합니다. 낙선전을 보고 온 기자들은 마네의 그림 실력을 조롱했으며, ‘얕은 배움과 형편없는 기량, 어색한 구도로 부르주아들의 방탕함이나 그리는 작자’라고 비웃었습니다. 전시 기간 동안 마네를 향한 비방과 풍자는 여러 신문 앞면에 실렸으며, 마네는 프랑스 예술사회에서 오는 각종 질책과 혹평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오직 그의 가족들과 동료들만이 그를 위로할 뿐이었죠.

    전통 파괴자 모더니스트 마네?

    마네는 정말로 당시 평론가들의 말처럼 ‘전통을 무시하고 실력도 형편없는 작자’였을까요? 마네는 자신을 결코 반항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파리의 유서 깊은 정치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또한 매우 유복했습니다. 고급 양복을 즐겨 입고 파리의 거리를 걸으며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전형적인 부르주아 멋쟁이 신사였죠. 화가의 길을 걷기로한 마네는 비평가들의 호평과 대중의 인정을 모두 받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와 명예를 다 가지고 싶었던 마네는 ‘어떻게 하면 과거를 존중하면서도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회화를 보여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그럼 어쩌다가 이러한 고민이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 같은 작품으로 이어졌을까요?
    질베르 랑동,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풍자화, 1867년. 1867년 6월 29일자 프랑스 풍자 신문 <르 주르날 아뮈장(Le Journal amusant)>에 실린 그림이다. 벌거벗은 여성 옆에서 태연하게 앉아 있는 옷 입은 남성들의 모습을 비꼬고 있으며, 낙선전이 끝난 지 4년이 지났음에도 마네의 그림이 여전히 조롱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 이미지 출처. 카르빈-타파보르 컬렉션
    질베르 랑동,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풍자화, 1867년. 1867년 6월 29일자 프랑스 풍자 신문 <르 주르날 아뮈장(Le Journal amusant)>에 실린 그림이다. 벌거벗은 여성 옆에서 태연하게 앉아 있는 옷 입은 남성들의 모습을 비꼬고 있으며, 낙선전이 끝난 지 4년이 지났음에도 마네의 그림이 여전히 조롱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 이미지 출처. 카르빈-타파보르 컬렉션
    1832년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마네는 아버지에 기대에 부응하고자 해군 장교의 길을 택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에 두 번이나 낙방한 뒤, 그는 부모님을 설득해 열망했던 미술을 공부하게 됩니다. 그는 당대 프랑스 최고의 예술대학이었던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 진학하는 대신 역사화가였던 토마스 쿠튀르(Thomas Couture, 1815~1879)의 개인 화실에 등록을 하게 되는데요, 쿠튀르 또한 에콜 데 보자르가 추구하던 엄격한 아카데미 회화 기준에 불만을 품고 이에 대항하여 독자적인 방식을 통해 새로운 세대의 역사화가들을 양성하고자 하는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대표작인 <퇴폐기의 로마인들>을 1847년 살롱에 출품해 유명해졌고, 아카데미 기법 위에 낭만주의와 사실주의적 요소를 혼합하여 극적인 연출을 유도해내는 방식을 제자들에게 전수해 줌으로써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마네는 쿠튀르 밑에서 약 6년 동안 그림의 구도와 색채를 다루는 법, 상징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 등 회화의 전반적인 기초를 체계적으로 익혔습니다. 하지만 쿠튀르가 당시 급변하던 프랑스 예술계의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변화를 거부하며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자, 마네는 이를 답답하게 여기며 독립을 택하기로 합니다.
    토마스 쿠튀르, <퇴폐기의 로마인들>, 1847년. 로마 제국의 타락과 몰락을 통해 도덕적 경계의 중요성을 경고한, 역사 속에 당대 프랑스 사회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숨겨 둔 교훈적 대작이다. / 이미지. © 오르세 미술관
    토마스 쿠튀르, <퇴폐기의 로마인들>, 1847년. 로마 제국의 타락과 몰락을 통해 도덕적 경계의 중요성을 경고한, 역사 속에 당대 프랑스 사회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숨겨 둔 교훈적 대작이다. / 이미지. © 오르세 미술관
    그는 루브르 박물관(Musée du Louvre)을 비롯해 유럽 전역의 주요 미술관들을 돌아다니며 스승이 아닌 거장들의 작품에서 직접 배우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티치아노(Titian, ????~1576),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 그리고 무엇보다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와 같은 대가들의 그림을 모작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예술적 역량을 쌓아갔습니다. 고야는 인간의 어두운 이면이나 문명이 저지르는 전쟁, 학살과 같은 참혹한 현실을 여과 없이 그렸는데요, 이러한 고야의 솔직한 표현 방식은 젊은 마네에게 예술은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는 막강한 힘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혹은 <1808년 5월 3일의 학살>, 1814년. 스페인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군에 맞선 스페인 민중의 처형 순간을 통해 전쟁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담아낸 고야의 대표작이다. / 이미지. © 프라도 미술관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혹은 <1808년 5월 3일의 학살>, 1814년. 스페인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군에 맞선 스페인 민중의 처형 순간을 통해 전쟁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담아낸 고야의 대표작이다. / 이미지. © 프라도 미술관
    에두아르 마네,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 1868-69년. 프랑스의 정치적 실패로 멕시코에서 처형당한 막시밀리안 황제를 다룬 역사화. 고야의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에서 영감을 받아 국가 폭력을 고발하는 마네의 사실주의적 시선이 담겼다. / 이미지. © 만하임 미술관
    에두아르 마네,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 1868-69년. 프랑스의 정치적 실패로 멕시코에서 처형당한 막시밀리안 황제를 다룬 역사화. 고야의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에서 영감을 받아 국가 폭력을 고발하는 마네의 사실주의적 시선이 담겼다. / 이미지. © 만하임 미술관
    마네의 초기작들은 당시 미술계로부터 따뜻하게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많은 비평가들은 그의 그림을 ‘미완성된 작품’이라며 폄하했고, 심지어 무능하다는 비난도 서슴없이 했습니다. 그러나 마네는 결코 그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누구보다 면밀히 연구했고, 어떤 규칙을 계승하고 또 어떤 규칙은 과감히 깨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그는 1863년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살롱에 출품하고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모든 것을 깨부숴버린 피크닉

    앞서 말했듯이, 1863년의 낙선전에서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프랑스 예술계에 준 충격은 어마어마했습니다. 하지만 노골적인 나체와 당당한 시선은 사람들이 문제 삼은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나체는 신화나 우화를 그린 그림 속에 자주 등장했으며, 그럴 경우 관람자나 비평가들은 비교적 관대했습니다. 중요한 건 ‘베일’이 있었느냐는 점이었죠. 고전적인 상징, 고대의 배경, 환상 속 존재라는 맥락과 신호가 있을 때에만 나체는 예술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마네는 그런 장치들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새로운 시도를 했습니다. 화면 속 여인은 공원 어디쯤에서 맞닥뜨릴 법한 평범한 인물처럼 보였고, 그녀는 동시대의 옷을 입은 남성들 사이에서 관람객들을 향해 당당히 눈을 마주쳤습니다. 신화라는 가림막 뒤에 숨지 않은 이 나체는, 당시 관객들이 익숙하게 여겼던 ‘예술로서의 누드’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그림은 주제뿐만 아니라 ‘특이한 취향이 가미된, 서툰 그림’으로 여겨져 많은 이들의 불쾌감을 샀습니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낙선전을 보러 온 구경꾼들에게는 매우 급진적으로 느껴졌겠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작품의 뿌리는 서양 미술사 깊은 곳까지 닿아 있었습니다. 그림 속 구도와 자세는 모두 과거의 명작을 인용했는데요, 바로 그런 점이 일부 '뭘 좀 아는' 관람객들을 더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익숙한 구성을 빌려, 그것을 완전히 비틀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가장 직접적인 영감이 된 원천은 라파엘로의 소실된 드로잉을 바탕으로, 16세기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Marcantonio Raimondi, 1480~1534)가 제작한 판화 <파리스의 심판>입니다. 이 작품은 나무가 우거진 숲을 배경으로, 화면의 왼쪽에는 파리스가 바위 위에 앉아 세 여신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오른쪽에는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낮은 세 명의 인물들이 앉아 있는데요, 풍경 속 강의 신이나 물의 요정으로 추정됩니다. 마네는 여기서 흥미로운 시도를 합니다. 왼쪽 판화 속 주인공들을 과감히 지우고, 배경과 오른쪽에 앉아 있는 조연들만을 남긴 채 이들을 동시대 파리의 인물들로 바꿔 놓은 것이죠. 한 명은 나체 여성으로, 두 명은 현대적인 복장을 한 남성으로 말입니다.
    [좌]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파리스의 심판> 라파엘로의 동일한 이름의 소실된 작품을 모작 일부, 1515년경. [우]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일부, 1863년. / 이미지.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오르세 미술관
    [좌]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파리스의 심판> 라파엘로의 동일한 이름의 소실된 작품을 모작 일부, 1515년경. [우]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일부, 1863년. / 이미지.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오르세 미술관
    티치아노의 작품으로 알려진 <전원의 합주곡> 또한 마네가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구상하는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었답니다. 이 그림에는 잔디밭에 앉아 음악을 연주하는 세 사람과, 옆에서 대리석 유리잔으로 물을 뜨려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여성들은 다리까지 흘러내린 옷 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체이고, 남성들은 16세기 베네치아 양식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넓고 평화로운 전원의 배경에는 양치기와 목가적 풍경이 펼쳐져 있죠. 마네는 이 전통적인 구도를 빌리지만 미화된 여인의 나체를 그리기를 거부합니다. 뚜렷한 윤곽과 흔적이 남는 붓질, 그리고 평평한 조명으로 인물들을 묘사해 아카데미 회화의 매끄러운 피부의 질감을 정면으로 거부했습니다. 사실 옛 거장들의 작품을 인용해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은 당대에도 희귀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네의 방식이 달랐던 점은, 자신이 영감을 받았던 구도나 주제를 공손하게 재현하거나 경의를 표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옛 거장들의 설계도를 빌리되, 그것을 대놓고 비틀어 당대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든 거죠.
    티치아노 베첼리오, <전원의 합주곡>, 16세기 1분기 추정. 왼쪽에 유리잔으로 물을 뜨는 여인은,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서 그림 뒤, 물가에서 목욕하는 여인으로 재해석되어 등장한다. / 이미지. © 루브르 박물관
    티치아노 베첼리오, <전원의 합주곡>, 16세기 1분기 추정. 왼쪽에 유리잔으로 물을 뜨는 여인은,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서 그림 뒤, 물가에서 목욕하는 여인으로 재해석되어 등장한다. / 이미지. © 루브르 박물관
    일부 학자들은 마네의 이러한 태도를 ‘적대적 경의(antagonistic homage)’라고 표현했습니다. 존경과 도전을 동시에 담은 태도였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르네상스의 조화와 모더니즘의 불편함, 전통의 인용과 저항의 발명 사이에서 충돌하는 지점에 서 있습니다. 마네는 결코 그에게 비우호적이었던 자들이 말한 것처럼 미술사를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철저히 이해하고, 그 친숙함을 전복의 무기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림 속 퇴폐의 상징과 이야기

    마네와 동시대를 살았던 저명한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Émile Zola, 1840~1902)는 이 그림을 적극 옹호하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그림이 논란이 된 이유는, 옷을 입은 두 남자 사이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여인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루브르 박물관에만 해도 옷 입은 사람과 나체 인물이 함께 등장하는 그림이 50점은 넘는다.”

    졸라는 이 논쟁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었습니다. 이 그림이 일으킨 파문은, 관람객의 존재를 인지하고 마치 무엇을 알고 있다는 듯한 여성의 시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인의 눈길은 무엇을 시사할까요? 마네는 이 작품에 대한 그 어떠한 설명도 직접 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저 남아있는 마네에 관한 자료들과 그가 화폭 속에 담은 여러 상징들을 통해서만 이 그림의 의미를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네가 이 그림의 제목을 확정하기 전, 사적으로 <라 파르티 까레(La partie carrée)>라는 별칭으로 부르곤 했습니다. 이 표현은 겉으로는 ‘네 사람이 모인 집단’을 의미하지만, 프랑스어 관용 표현으로는 두 남성과 두 여성으로 구성된 사적 모임, 혹은 더 노골적으로는 성적인 관계를 암시하는 상황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마네와 동시대를 살았던 제임스 티소(James Tissot, 1836~1902) 역시 나중에 동일한 제목을 가진 그림을 남겼는데요, 이 작품에서도 두 쌍의 남녀가 야외에서 소풍을 즐기며 음주를 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네의 경우, 여성의 누드와 함께 이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림 속 인물들의 관계에 더욱 불건전한 의미를 부여해, 관람자들의 불편한 상상력을 자극한 셈입니다.
    제임스 티소, <파르티 카레>, 1870년. / 이미지. © 캐나다 국립 미술관
    제임스 티소, <파르티 카레>, 1870년. / 이미지. © 캐나다 국립 미술관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티치아노의 <전원의 합주곡>에서 물병 들고 우물가에 서 있는 여인이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서는 야외에서 성행위를 마치고 물가에서 깨끗이 씻고 있는 여인으로 재정의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그림 속 바구니가 엎질러진 모습은 순결 혹은 순수함의 상실을 뜻하는 상징으로 흔히 쓰인 표현이었고, 바구니에서 쏟아져 나오는 각종 복숭아, 체리, 무화과 같은 과일과 굴 껍데기는 전통적으로 정력과 성적인 은유로 흔하게 쓰이던 소재였습니다. 이렇게 마네는 고전 회화의 상징체계를 그대로 활용하면서도, 그것을 신화가 아닌 현대 파리의 풍경 속에 배치함으로써 작품을 스캔들의 한복판에 놓았습니다.

    아마도 마네는 제목, 구도, 상징 등 회화의 모든 수단을 동원해 프랑스 사회의 방탕한 부르주아 성 문화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은유를 꿰뚫고 있는 듯, 부끄러움 없이 정면을 응시하는 알몸 여성의 시선은 그 의도를 가장 명확하게 응축한 ‘느낌표’였습니다. 매춘을 암시하는 설정, 모호한 관계, 그리고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여인의 태도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부르주아들의 도덕적 허위와 위선을 날카롭게 비추는 거울이었습니다. 낙선전의 전시장을 찾은 대다수의 관람객은 부르주아들이었고, 마네는 그들의 고상한 취향과 도덕적 우월감을 정면으로 뒤흔들어 보는 이들을 분노와 당혹감에 빠뜨렸습니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일부, 1863년. 뒤집힌 바구니에서 쏟아져 나오는 각종 복숭아, 체리, 무화과 같은 과일과 굴껍데기는 전통적으로 정력과 성적인 은유로 흔하게 쓰이던 소재였다. 왼쪽 구석에 작게 그려진 개구리는 당시에 창녀를 지칭했다는 속설 또한 존재한다. / 이미지. © 오르세 미술관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일부, 1863년. 뒤집힌 바구니에서 쏟아져 나오는 각종 복숭아, 체리, 무화과 같은 과일과 굴껍데기는 전통적으로 정력과 성적인 은유로 흔하게 쓰이던 소재였다. 왼쪽 구석에 작게 그려진 개구리는 당시에 창녀를 지칭했다는 속설 또한 존재한다. / 이미지. © 오르세 미술관
    외설에서 시대를 상징하는 명화로

    마네가 그린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서양의 고전 회화를 죽였다고 평가받습니다. 어떤 이들은 마네가 회화 속으로 현대성 그 자체를 끌어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당시 사회가 환상과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집착할 때, 마네는 이 그림을 통해 불편할 정도로 솔직한 현실을 정면으로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마네의 몰락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비난은 그를 지워버리기는커녕, 오히려 미술사에 길이 남을 이름으로 만들었습니다. 여러 후대 예술가들은 마네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들은 화면을 평면화하고, 붓질을 캔버스 위에 그대로 남겼으며, 신화나 교훈적 주제보다는 일상과 찰나의 인상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결국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미술 사조로 이어지게 됩니다. 마네가 불러온 변화는 단지 형식의 전환이 아니라, 예술이 바라보는 대상과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꾼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파리의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오르세 미술관에 당당히 걸려 있습니다. 한때 외설이라 손가락질받았던 이 그림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미술관에서 파리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걸작이 되었습니다.

    이지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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