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해운 구조조정, 가습기 살균제, 정운호 게이트. 요즘 우리 사회의 분노지수를 치솟게 한 사건들이다. 진상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반복되는 참담함을 감당하는 일은 고역이다. 어이없는 전개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건 소위 지식인들의 ‘도덕성 파탄’과 ‘직업적 배신’이다.

조선·해운 사태에서는 전문가의 책무를 저버린 회계사들의 타락상을 보게 된다. 부실 덩어리던 STX조선과 대우조선이 국책은행에서 수조원을 지원받고 5년여를 연명한 건 다름 아닌 분식회계의 힘이었다. 청산이 유력하던 성동조선도 ‘장부 마사지’를 거치니 ‘존속 가치가 더 크다’는 쪽으로 결론이 뒤바뀌었다. 현대상선 한진해운 등 국적선사들이 두어 달 전까지 ‘존속 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아낸 것도 미스터리다.

지식인들의 '양심에 눈 감기'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한 회계사의 고뇌 가득한 토로가 답일 듯싶다. “회계사는 영혼을 팔아먹는 직업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숫자를 만들어 냅니다.” 회계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인프라다. ‘합리적 회계는 자본주의 정신의 정수’라던 막스 베버의 말 그대로다. 베버 시각에서 보면 한국 자본주의의 시계는 ‘막장 5분 전’쯤에 가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회계사뿐이겠는가. 대표적 지식인 그룹인 교수 세계에서도 ‘영혼 장사’는 오래된 비즈니스다. 조선·해운에 22조원이나 물린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은 정부 경영평가에서 줄곧 ‘최우수’ 수준의 등급을 받았다. “저녁 얻어먹고, 골프 치고 하다 보니 그리 되더라”는 게 평가에 참여한 교수의 말이다. 후한 평가를 통해 까탈스럽지 않은 성향을 인증하고 ‘관변 카르텔’에 진입해야 다음 용역과 감투가 주어지는 게 그 바닥의 생리다. 가습기 살균제 사태에서도 한국 지식인들의 값싼 영혼과 마주친다. ‘최고 지성’이라 할 국립 서울대 교수가 제조 회사에 유리한 ‘청부 보고서’를 생산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독성학계의 권위자’라는 명성은 진실을 저격하는 치명적 무기였던 것일까.

'법치의 적'으로 의심받는 前官

‘정운호 게이트’의 홍만표·최유정 변호사 사례는 지식인의 영혼 장사가 공동체의 지속을 위협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전관의 위세는 법치와 정의라는 절대가치를 구매 가능한 상품으로 전락시킬 만큼 강력했다. 건당 수십억원에 달한 수임료는 전관예우가 우리네 인지상정의 연장이 아닌 범죄적 행위임을 웅변한다. 상식을 뛰어넘는 게이트의 전개 과정은 공동체 구성원들을 좌절시키고, 신뢰 자산을 훼손하고 있다.

전관들이 먹이 사슬의 상층부에서 국가사무까지 왜곡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만만찮다. “경쟁사가 장관 출신을 영입한 뒤 정부의 면세정책이 일방적으로 그쪽에 유리하게 바뀌고 있다”는 게 한 면세점 대표의 심증이다.

디스토피아의 고전 《1984》의 조지 오웰. 영혼도 굴복당한 음울한 미래를 상상한 그는 지식인을 ‘서커스장의 잘 훈련된 개’로 은유했다. 먹을 것만 주면 알아서 재주를 부리는 개와 추한 지식인 군상을 오버랩시켰다. 시장 질서를 흔드는 회계사, 연구보다 로비가 우선인 교수, ‘법치의 적’이 된 법률가의 범람에서 오웰의 통찰이 새삼스러워진다. 쾌락과 젊음을 위해 영혼을 저당잡힌 도리언 그레이의 기괴해진 초상이 머릿속에 어른거리는 요즘이다.

백광엽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