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탕 싸움'된 아파트 입주자대표 선거
서울 아파트단지 곳곳이 입주자대표회를 둘러싼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일부 아파트에서는 대표 선거가 과열돼 법정 다툼이 벌어지는가 하면 현직 회장이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막대한 권한에 비해 외부 통제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 구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의 대표적 부촌으로 꼽히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는 입주자대표회장 선거의 공정성 시비로 투표함 탈취와 경찰 출동 등 소란이 벌어져 한 달째 파행을 빚고 있다. 이 아파트의 경우 입주자대표회장과 관리소장이 관리하는 돈만 80억원에 달한다.

지난 1월 말 치러진 선거에 3130가구 중 52%인 1665가구가 투표에 참여했다. A씨 등 4명이 회장선거에 입후보했는데 개표를 앞두고 A씨와 나머지 세 명으로 편이 갈렸다. 이들은 각각 개표 강행과 재선거 실시를 주장하고 있다.

전직 입주자대표회장을 지낸 B씨는 선거 마지막 날인 지난달 1일 “A씨가 선거 기간 선거관리 업무를 맡은 경비원들에게 ‘잘 부탁한다’며 명함을 돌렸다”고 주장하며 진상 조사가 끝날 때까지 개표를 중지할 것을 선거관리위원회에 요청했다. 결국 개표가 미뤄지고 재선거가 거론되자 A씨는 지난달 11일 법원에 개표 실시 가처분 신청을 냈다. 이에 반대 측은 법원에 A씨의 후보 자격 효력 정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이런 상황에서 법원 결정이 나오기도 전에 투표함 탈취와 폭행 시비가 터졌다. 지난달 29일 선거관리위원장이 ‘부정선거 의혹의 근거가 없다’며 개표 결정을 내리고 A씨 측과 함께 투표함이 보관된 입주자대표회의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개표를 강행한 것이다. 이들이 투표함 45개 중 19개를 개표했을 때 나머지 후보가 현장에 난입해, 양측 간 몸싸움이 벌어져 경찰까지 출동했다.

입주자대표회를 둘러싼 분쟁은 이웃 간 살인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서울 이태원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는 입주자대표회장 C씨(74)가 주민에게 폭행당해 숨진 사고가 발생했다.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에서는 입주자대표회 3개가 난립해 주민들이 지난겨울 난방도 못한 채 벌벌 떨어야 했다. 입주자대표회가 관리업체 문제로 소송을 벌이면서 두 패로 갈려 아파트 관리비 계좌가 정지됐기 때문이다. 일부 주민도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해 갈등에 가세했다.

이 같은 난장판의 이면에는 견제받지 않는 막강한 권한이 자리잡고 있다.

입주자대표회는 거액의 관리비 집행과 각종 용역 계약, 행사 유치 등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큰 권한을 행사한다. 입주자대표의 뒷돈 수수와 회계 조작 등 조직적인 비리 의혹이 끊임없이 불거지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건설업체도 입주자대표의 지나친 요구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입주자대표 임원이 본인들의 집에 빌트인 가구 등의 무상 설치를 요구했다”며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하자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압박해 어쩔 수 없이 들어줬다”고 말했다.

국무조정실 산하 부패척결추진단이 지난 10일 발표한 아파트 회계감사 결과에서도 외부회계감사 대상인 300가구 이상의 전국 아파트 8319개 단지 중 1610곳(19.4%)이 회계상 한정, 부적정, 의견거절 판정을 받는 등 관리비 회계 관리가 부실한 것으로 나타났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