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맥] MRO 거래 규제, 중소기업의 구매 선택권 생각해야
MRO 상생협약 수정 필요한가

소모성자재구매대행(MRO) 사업 규제 연장을 둘러싸고 대형 업체와 중소 유통사 간 입장 차이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지난 1년여간 협의가 이어져온 MRO 상생협약 의결이 최근 무산됐다.


동반성장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6월 이후 20여 차례 논의한 결과 행복나래(SK)·엔투비(포스코)·KT커머스는 MRO 상생협약을 체결했지만 서브원, 아이마켓코리아(인터파크)·코리아이플랫폼(KeP·광동제약)은 중견·중소기업의 MRO 업체 선택권 침해 문제를 지적하며 상생협약에 반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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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업체는 “연매출 3000억원을 기준으로 구매기업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문제점을 보완하지 않고 틀만 상생협약으로 바꾸는 부분에 대한 추가 협의가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동반위는 “당사자 의견을 수렴해 실질적인 상생 프로그램을 개발, 추가적인 협의를 진행하겠다”고 결론을 유보했다.

동반위는 2011년 대기업 MRO 업체는 매출 3000억원 이상 기업만 대상으로 영업하도록 규제하는 내용의 ‘MRO 가이드라인’을 3년 시한으로 마련해 시행했다. 3년 후인 2014년 가이드라인 시한이 만료되자, 동반위는 기존 가이드라인 보완을 명목으로 1년 연장했고, 이후 상생협의추진팀을 구성해 대기업 MRO 업체와 한국산업용재협회 한국문구유통업협동조합 등 MRO 관련 중소상공인단체들과 ‘상생협력’ 방안을 추진해 왔다.

MRO 가이드라인 마련은 대기업 MRO 업체의 시장 독식을 막겠다는 취지였다. 매출 3000억원을 기준으로 구매기업을 나눠 거래 가능한 MRO 업체를 지정해 수요를 배분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 가이드라인은 산업 전반에 적잖은 부작용을 초래한 게 사실이다. 국내 기업 간(B2B) 전자상거래 산업의 핵심이던 MRO산업 전체가 침체의 늪에 빠져든 것이다. 여론을 의식한 삼성 등 대기업은 MRO 사업부문을 매각하거나 규모를 줄였다. 대기업 MRO 업체는 2011년 13개에서 2014년 6개로 급감했다. 그나마 남은 대기업 MRO 업체도 이 기간 매출이 9.2% 감소하는 등 경영상 어려움에 직면하는 상황이 됐다.

중소 유통업체 매출도 정체

주목할 것은 대기업 MRO 업체의 매출이 줄면서 이들 업체에 납품하던 중소기업 수만개의 매출도 18% 줄었다는 것이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대기업 납품 중소기업당 평균 매출이 2011년 145억원에서 2013년 120억원으로 큰 폭 감소했다. 대기업 MRO 업체와 거래하는 납품 중소기업은 5만여개를 헤아린다.

그렇다고 해서 반사이익을 기대한 중소 유통상의 매출이 늘어난 것도 아니다. MRO 가이드라인 시행 이후 15개 주요 중소 MRO 업체의 매출은 2011년 4255억원을 기록한 이후 4000억원대를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 도리어 국내 진출을 본격화한 외국계 대기업 MRO 업체라는 새로운 경쟁 상대와 맞닥뜨려야 했다. 외국계 MRO 업체는 국내 대기업이 철수한 빈자리를 노리고 2011년부터 국내 진출을 본격화했다. 2014년, 세계 1위인 미국 그레인저와 독일 뷔르트 등이 한국 시장에 발을 디뎠으며 기존 미국 오피스디포와 프랑스 리레코 등도 사업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이들은 규제 기간에 17% 이상 큰 폭으로 성장하며 국내 MRO산업 생태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글로벌 경기 침체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매출 3000억원 이하 중견·중소 제조기업이다. 가이드라인 규정에 따라 매출 3000억원 이하 중소기업은 대기업 MRO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고 무조건 중소 유통상을 통해 물품을 구매해야 한다. 대기업 MRO 업체와의 공동구매를 통한 구매비용 절감 및 투명성, 효율화의 기회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중소 MRO 유통상의 생존권을 보호하자고 만든 규제가 중소 유통상도, 대기업도, 중견·중소 제조업체도 보호하지 못한 채 국내 산업 생태계 전반에 피해를 주고 있는 것이다.

MRO산업은 한때 정부가 정책사업으로 육성·지원하기도 했다. 2000년대 초·중반 정부는 산업자원부 산하에 전자상거래과를 신설하고 국내 B2B 전자상거래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온라인 기반의 대기업 MRO사업을 집중 육성했다. 2007년에는 경기 침체 등으로 경영상 어려움이 많은 중소기업의 구매 경쟁력 강화를 위해 신용보증기금이 대기업 MRO 업체와 ‘MRO 구매 지원을 위한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출연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협약 내용은 중소기업의 채권을 신용보증기금이 보증해 중소기업이 더 쉽게 대기업 MRO 서비스를 이용하도록 지원하는 정책이었다.

대기업 MRO 육성했던 정부

이런 정책적인 지원으로 인력과 자본이 적어 구매 효율화를 꾀하기 어려운 중소기업은 대기업 MRO 업체의 막강한 구매력과 정보기술(IT) 구매 시스템, 물류 인프라를 공유하며 구매 경쟁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2011년 MRO 가이드라인 규제 이후 매출 3000억원 이하 기업은 더 이상 대기업 MRO 업체의 구매 시스템을 이용할 수 없어 구매 프로세스 간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드는 오프라인 구매 시스템을 이용하는 데 따른 어려움을 호소하는 처지에 몰렸다. 대기업 MRO 업체의 시장 확장을 제한한다는 의도가 되레 중견·중소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시장경제 아래에서는 돈을 내는 소비자에게 유통업체와 물건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생태계 동반발전 방법 찾아야

그런데 MRO 가이드라인은 유통업체가 구매자를 선택하는 유통구조를 만들었다. 유통업체 간 담합구조가 돼 버린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구매 중견·중소 제조기업의 생존권에 영향을 미치는 규제사항인데도 재연장을 위한 협의 과정에 이들 중견·중소 제조기업의 의사는 배제됐다는 것이다.

상생은 모든 산업이 함께 성장·발전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모두가 함께 하향 평준화되는 것은 상생이라고 할 수 없다. 시장 상황에 맞지 않은데 근거가 부족한 기준으로 규제를 강요하는 것은 안 된다. 시장의 관점에서 본다면 MRO 가이드라인은 잘못 설계된 것이다. 인위적으로 산업 생태계를 통제하다 보니 구매 중견·중소 제조기업은 ‘소비자 주권’을 잃고, 대기업도 중소기업도 성장이 아니라 하향 평준화되는 부작용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결국 MRO 관련 국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경쟁력은 하락할 수밖에 없다. 모든 산업주체가 ‘윈윈’하며 상생발전하는 상생협약 마련이 시급하다.

양준모 <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