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가 15년 만에 디폴트(채무불이행) 상태에서 벗어나 국제자본시장에 복귀하게 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아르헨티나가 경제위기를 담보로 ‘벼랑 끝 승부’를 벌인 헤지펀드에 굴복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가장 큰 실속은 지난해 삼성의 지배구조개편에 반대하면서 법정공방을 벌인 엘리엇매니지먼트가 챙겼다.
삼성에는 졌지만 아르헨티나 'KO 시킨' 엘리엇
◆엘리엇, 투자원금의 10~15배 챙겨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아르헨티나는 29일(현지시간) 채무탕감 조건을 거부한 주요 채권단에 원리금의 75%인 46억5300만달러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최종 합의에 도달했다. 협상 당사자는 억만장자 폴 싱어(사진)가 이끄는 엘리엇매니지먼트와 같은 계열의 NML캐피털과 아우렐리우스캐피털, 데이비슨캠프너, 브레이스브리지캐피털 등 4개 헤지펀드다.

이들은 부도 위기에 빠진 기업이나 국가 채권을 헐값에 사들인 뒤 채무탕감을 거부하고 미국 법원에 원리금 반환소송을 제기, 전액 보상 판결을 받는 식으로 고수익을 올려 ‘벌처펀드’로 불리기도 한다. 벌처(vulture)란 대머리독수리란 뜻으로, 썩은 고기를 먹고 사는 독수리의 습성에 비유해 붙여진 이름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업계 관계자의 말을 인용, 엘리엇이 그동안 제기한 소송비용과 채권 원금 이자까지 모두 챙기게 됐다며, 액면가 20%에 채권을 사들여 10~15배에 달하는 수익을 거둬들이는 것이라고 전했다. 엘리엇은 이날 구체적 이익 규모와 채권매입 시점은 밝히지 않은 채 대변인을 통해 “합의에 도달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며 만족감을 나타냈다.

아르헨티나는 2001년 1000억달러의 대외 부채에 대해 디폴트를 선언한 뒤 2005년과 2010년 협상에서 채권단의 93%와 원금의 4분의 3을 탕감하는 채무조정에 합의했다. 그러나 채권 일부를 사들인 엘리엇은 채무조정을 거부하고 원리금 반환소송을 제기해 2012년 미국 뉴욕지방법원으로부터 전액 승소 판결을 받았다.

당시 아르헨티나 정부는 엘리엇을 “국제금융시장의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하면서 원금상환을 거부했고, 2014년 7월 기술적 디폴트(채무계약 조건 위반 등 특정 사유에 따른 일시적 채무불이행)에 빠졌다. 이 과정에서 엘리엇은 2012년 아프리카 가나에 정박 중인 아르헨티나 군함 3척을 압류하기도 했다.

◆삼성에 당한 손실, 아르헨티나에서 만회

삼성에는 졌지만 아르헨티나 'KO 시킨' 엘리엇
WSJ는 이번 협상 타결로 부채 위기에 몰린 국가가 디폴트를 선언하면 채권자들이 손실을 보는 기존 관행이 깨지면서 새로운 선례가 나왔다고 분석했다.

소수 채권자가 부채탕감을 거부하고 끝까지 버티기 전략으로 맞서면서 해당 정부를 국제적으로 고립시켜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시범 케이스’가 됐다는 설명이다.

아르헨티나가 엘리엇과의 협상에 응한 것은 국제자본시장에서 자본을 조달할 길이 막히면서 외환보유액이 감소하고 경기침체를 타개할 추가 재원을 마련할 방법이 없다는 현실론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이번 합의도 지난해 말 취임한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이 경제를 조속히 정상화하기 위한 공약으로 내걸면서 실마리를 찾았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채무 상환을 위해 15억달러 규모의 국채를 발행, 국제자본시장에 다시 진출한다는 계획이다. 헤지펀드도 이를 방해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엘리엇은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반대하면서 법정 소송과 주주총회에서 표대결까지 벌였으나 무위에 그쳐 막대한 손실을 떠안았다. 하지만 이번 협상으로 상당한 이익을 챙기게 됐다.

한 가지 관문은 남아 있다. 아르헨티나 정부와 채권단의 합의는 의회 동의를 거쳐야 확정된다. 의회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아르헨티나 야당은 이번 합의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의회 표결에 앞서 모든 협상관련 정보를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합의안에 따른 채권상환기간은 오는 4월까지다.

뉴욕=이심기 특파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