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독립선언서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此)로써 세계 만방에 고하야 인류 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써 자손 만대에 고하야 민족 자존의 정권(正權)을 영유케 하노라. …”

육당 최남선이 천도교 간부였던 최린과 협의해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 시작한 것은 1919년 2월10일께였다. 당시 육당은 29세였지만 문장력은 이미 조선에서 최고 반열이었다. 작업은 일본인 지인집에서 주로 이뤄졌으며 원고를 완성한 다음날인 27일 보성사와 신문관에서 인쇄를 했다. 두 곳에서 2만1000장을 찍어 전국에 뿌렸다.

육당은 1955년 잡지 《새벽》에 기고한 ‘내가 쓴 독립선언서’에서 선언서의 취지를 밝혔다. 그는 우선 독립 정신은 민족 고유의 양심에서 유래한다고 밝혔다. 당시 중국을 종주국으로 해야 한다는 일부 의견을 정면 부인한 것이다. 또한 독립운동은 단순한 배일(排日)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당연한 지위를 요구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애국심과 배일정신을 혼동해 마치 일본이 밉기 때문에 조선이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는 아울러 조선 독립이 세계 역사의 추세에 비춰 불가결한 것임을 강조했다. 한국에서도 민족주의가 형성되고 근대적 개념의 시민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린 대표적 선언문이었다.

3·1 독립선언서 발표에 앞서 한 달 전 일본 도쿄 유학생들이 발표한 2·8 독립선언서도 이 같은 정신이 깃든 선언서다. 하지만 춘원 이광수가 기초한 2·8 독립선언서는 3·1선언서의 성격과 약간 다르다. 이 선언서의 “오족(吾族)은 생존의 권리를 위해 온갖 자유 행동을 취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자유를 위한 열혈(熱血)을 유(流)할지니…”에서 보듯 폭력을 불사하고 끝까지 피흘려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3·1 독립선언서에 대해 이승만은 제퍼슨이 기초한 미국 독립선언서를 능가하는 작품이라고 평가한 반면 김구는 임시정부에서 독립선언서 낭독을 폐지할 만큼 싫어했다. 김구는 오로지 유혈 투쟁의 가치만 인정했기 때문이다.

서울시가 어제 개인이 소장한 보성사판 독립선언서를 문화재청에 등록문화재로 인정해줄 것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보성사판 독립선언서는 첫 줄에 조선을 선조(鮮朝)라고 표기하는 등 오자가 있으며 판형과 활자체도 신문관판과는 다르다고 한다. 독립선언서가 아직 국보나 보물이 아니라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