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중앙은행에 대한 의구심
금리가 마이너스가 된다는 것은 좋게 말해도 혼돈이며 포스트모던이다. 마이너스 이자, 즉 예금에 벌금을 매기고 있는 곳은 유럽중앙은행(ECB) 스웨덴 덴마크 스위스 일본이다. 스웨덴은 2009년 -0.25%의 수수료를 도입했다가 3개월 만에 철회한 뒤 2012년 재도입했다. 현재 -0.35%. 덴마크는 2012년 -0.1%에서 시작한 다음 네 번이나 더 내려 -0.65%다. 스위스는 2014년 7월 -0.75%, 일본은 2016년 1월29일 -0.1%의 역(逆)금리다. ECB는 -0.3%다.

갈수록 대담해지고 있지만 역금리는 과연 가능한 것일까.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한 대부분 국가들은 강세통화가 거북스러운 강소국들이다. 세계 3위 경제대국 일본까지 마이너스 금리를 채택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상어 떼가 벌써 피 냄새를 맡고 움직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중앙은행은 자식을 많이 거느린 아비와 같아서 싸움질에 나서기에 적합하지 않다. 화끈하게 싸우면 조지 소로스 정도야 일축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기업과 투자자, 즉 내 자식들도 죽어나간다. 우리가 선량한 것은 종종 자식 때문이라는 사실을 깡패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일본 국채 수익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선 것은 실로 걱정스럽다. 지금 일본 국채를 사면 놀랍게도 원금보다 적은 금액을 만기에 상환받는다. 그런데도 돈이 몰리는 것은 오로지 일본은행이 마이너스를 더 확대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물론 만기물의 가격은 언젠가는 폭락할 것이다. 그러나 케인스 말마따나 인간은 언젠가는 죽고, ‘죽기 전 한탕’을 사람들은 원한다. 비이성적 폭탄 돌리기가 성행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본 당국의 목표는 명확하다. 엔화 약세를 유도해 수출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엔화는 강세로 돌아서 버리고 말았다. 이자도 안 주는, 아니 예금에 벌금을 매기는데 엔화가 초강세인 기현상 역시 투기 수요 때문이다. 마이너스 금리는 이렇게 시작부터 실패로 귀결되고 있다. 일본만의 미친 짓이라면 통하겠지만 모두가 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효과도 없다. 결국에는 ‘금리 정상화를 위한 강요된 국제적 합의’라도 나와야 이 미친 환율 전쟁은 종식될 것이다. 이럴 바엔 차라리 금본위제가 낫지 않겠는가.

세계가 투기 골병에 신음하고 있다. 소로스와 중국의 전쟁도 그중 하나다. 1차전에서는 중국이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연말까지 가야 결판이 날 것이다. 한 달에 1000억달러씩 쏟아부으면서 벌어지는 위안화 공방전은 사상 초유의 규모다. 1997년 한국 외환위기 당시의 달러 부족분이라고 해봤자 수개월에 걸쳐 200억달러에 불과했다. 지금 공수 쌍방은 중국의 3조달러조차 충분한 판돈인지를 계산하기 바쁘다.

거대한 부동자금이 세계 금융시장을 짓밟고 다니는 것은 미국이 양적 완화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풀어 먹인 조단위의 뭉칫돈 때문이다. 1990년대 초 파운드를 공격했던 헤지펀드들은 아시아와 남미의 바보들을 차례로 때려눕힌 다음 이제 세계 2위, 3위 경제대국인 중국과 일본을 공격할 정도로 대담한 세력으로 자라났다. 실탄도 충분하다. 지금은 와타나베 부인들까지 투기판에 뛰어들었다지 않는가. 순진한 예금자들을 투기꾼으로 만든 것은 중앙은행이다. 양적 완화는 눈치 빠르게도 돈의 출구 쪽에 자리 잡은 자들의 부를 늘려줄 뿐이다. 그것은 결코 땀 흘리는 사람들의 돈이 아니다. 그래서 버니 샌더스도 할 말이 많다. 노동을 천시하고 투기를 장려하는 것이 중앙은행의 정책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짓들을 하고 있다.

돈 풀어 경기 살린다는 미신이 공리(公理)처럼 되고 말았다. 금리는 시간의 가치다. 그런데 시간의 가치를 저주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앙은행 대신 성능 좋은 인쇄기가 필요할 뿐이다. 실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그러는 사이 정작 산업정책은 사라지고 없다. 산업의 혁신 없는 경제적 성취는 신기루다. 경제민주화라는 말로 산업을 꽁꽁 묶어 놓고 있는 한국은 더욱 그렇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