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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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안에는 2만5000여명의 목소리가 있다. 그중엔 주변 잡동사니로 척척 도구를 만들어 사건 해결에 나서는 첩보원 맥가이버가 있고, “나와라, 가제트 만능 팔”을 외치는 형사 가제트가 있고, 영화 ‘굿모닝 베트남’ ‘미세스 다웃파이어’ ‘굿 윌 헌팅’에서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던 로빈 윌리엄스가 있고, 영화 ‘대부’ 속 고독한 눈빛의 마피아 보스를 열연한 알 파치노가 있다. ‘천의 목소리를 가진 국민 성우’라 불리는 남자, 배한성 씨(70·사진)다.

올해로 성우생활 50년을 맞은 배씨는 요즘 복고 열풍을 몰고온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로 다시 한 번 화제가 됐다. 1980년대 인기리에 방영됐던 미국 TV 드라마 시리즈 ‘맥가이버’의 대사가 나온 것이다. ‘응답하라 1988’ 속 등장인물 ‘김정봉’은 배씨가 더빙한 맥가이버의 대사 “할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를 따라하며 보일러를 고치고, 막힌 변기를 뚫는다. 시청자들이 그 장면을 보며 배를 잡고 웃는 사이, 맥가이버 속 배씨의 목소리는 추억에서 현재로 돌아왔다.

최근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인근의 한 카페에서 배씨를 만났다. 일흔이란 나이가 무색할 만큼 젊어 보였고, 활기가 넘쳤다. “지금까지 더빙한 캐릭터가 2만5000명 정도 됩니다. 제 목소리보다 남의 목소리로 살아온 세월이 훨씬 길어요. 숙명이니 어쩔 수 없죠. 그 목소리들이 있기에 오늘의 제가 있으니까요.”

가난 속 유일한 위로, ‘영화’

“어떤 계기로 성우가 됐느냐”는 질문에 배씨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네 살 때부터 집에 안 계셨다”는 말을 하면서도 특유의 빠르고 쾌활한 어조를 잃지 않았다.

그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함경도 출신인 아버지는 경기중과 서울대를 졸업한 엘리트였지만 좌익 활동을 하다가 결국 북한에 남았다. “아버지가 안 계셔서 집안에 어른은 어머니밖에 없었어요. 어머니는 서울여상을 나올 정도로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홀로 된 뒤 생기를 잃으셔서 자녀들을 먹여 살릴 만한 생활력이 부족했죠.”

중학생 때부터 신문 배달, 사환 등의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는 “내가 돈을 안 벌면 굶는다는 생각을 했고, 실제로도 그랬다”며 “중학교 다닐 때 등록금이 없어서 힘든 적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덕수상고 재학 시절엔 실습 중 도끼날에 오른손 검지를 다쳤다. 그 후유증으로 주산을 할 수 없게 됐고, 은행에 취직해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도 접었다. “오른손 검지 끝이 부어오른 채 굳어버려서 주판을 쓸 수 없었어요. 은행에 들어가겠다는 꿈으로 상고에 진학한 것이었는데 그리돼 버렸으니 정말 어이가 없었죠.”

영화는 고달픈 일상의 유일한 위로였다. 배씨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건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그는 “어머니가 어릴 때 외국 영화 이야기를 마치 전래동화 들려주듯 자주 말씀하셨다”며 “좋아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영화에 흥미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제가 어렸을 땐 학생들은 극장에 함부로 못 들어가게 했어요. 이른바 ‘건전 영화’나 ‘안보 영화’ 단체 관람만 가능했죠. 그래도 영화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몰래 극장 담을 넘어 들어가거나, 어른으로 변장해서 영화를 보러 갔죠.”

영화를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화를 동경했다. 배우가 되고 싶었다. 자신의 외모로는 영화배우를 하긴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택한 진로가 성우였다. “그때만 해도 조각 미남만 배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얼굴로 연기할 수 없다면 목소리로 연기하자’는 마음으로 성우를 꿈꿨어요.”

인생을 바꾼 ‘두 번의 기적’

배씨는 “내 인생엔 두 번의 기적이 있었고, 그것이 삶을 완전히 바꿨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첫 번째 기적’은 대학 입학이고, ‘두 번째 기적’은 성우 시험 합격이다.

성우가 되기 위해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고 싶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당시 대학 등록금이 셋방살이 보증금의 열 배가 넘었습니다. 대학 입학은 꿈도 못 꿨죠. 그런데 방송사들은 성우 공개채용을 할 때 대학졸업을 기본 자격으로 내세웠어요.”

포기하려던 배씨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그의 친구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형제처럼 지내던 친구가 내 얘기를 듣고 나서 자기 친척에게 돈을 꾸고 그 돈을 내게 ‘등록금으로 쓰라’며 내밀었다”며 “그 친구가 준 우정은 평생 갚지 못할 소중한 보물”이라고 회상했다. 그렇게 서라벌예술대 방송연예과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는 1966년 동양방송(TBC) 성우 공채 2기로 합격했다. 10명을 뽑는 데 1800명이 몰렸다. “경쟁률이 180 대 1이었는데 그중 태반이 허수였어요. 정말 성우가 되고 싶어 응시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죠. 워낙 실업자가 많던 시기라 어느 일자리든 채용 공고만 나면 구직자가 미어터졌습니다. 그래도 그중에서 선발됐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천운인 것 같아요.”

초창기엔 선 굵은 목소리를 선호하는 분위기 때문에 특유의 비음을 가진 배씨의 목소리는 외면받았다. 해외 영화와 드라마가 많이 수입되고, 입체적인 성격의 캐릭터를 표현할 목소리를 원하는 곳이 많아지면서 비음은 콤플렉스에서 트레이드 마크로 변신했다. 수많은 영화 속 주인공의 더빙을 맡았다.

“더빙할 영화를 한 번만 보고 녹음한 적은 없습니다. 최소 세 번은 봤죠. 사소한 움직임이라도 놓치지 않고 거기서 차별점을 찾아 캐릭터를 최대한 살리고자 했습니다. 호흡할 지점, 감탄사를 내뱉을 지점 등을 대본에 일일이 표시하고, 종이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었어요. 이 때문에 ‘배한성의 대본은 더럽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제겐 정말 영광스러운 칭찬이었죠.”

배씨는 클래식 음악과 고전미술, 문학 작품 읽기 등 문화적 소양을 넓히는 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서였다. “주인공 역할 더빙을 많이 맡았어요. 주인공의 목소리를 내려면 평소 행동과 마음가짐도 주인공답게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결코 주인공의 목소리가 나올 수 없습니다.”

“롱런(long run) 하려면 롱런(long learn) 해야”

배씨는 현역 성우이자 서울예술대 교수, 스타 강사로 활약 중이다. 그는 “‘롱런(long run) 하려면 롱런(long learn) 해야 한다’는 말을 요즘 신조처럼 삼고 있다”며 “‘인생길 오래가고 싶다면 오랫동안 배워야 한다’는 뜻이니 나이에 상관없이 늘 열린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한다”고 강조했다.

배씨가 가장 경계하는 건 ‘경험과 능숙함, 통찰의 덫’에 빠지는 것이다. “경험이 많은 것만 믿으면 그 안에 갇혀 버리고, 능숙함만 믿으면 거기서 발전이 없고, 자신의 통찰만 믿으면 마음이 닫혀 버린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사람의 목소리는 노화 속도가 아주 느리다고 해요. 성우란 직업의 생명력이 긴 것도 이 때문이죠. 저는 아무런 스펙이 없었기에 저만의 스펙트럼을 넓히려 노력했어요. 맡은 캐릭터마다 모두 다 다른 소리를 내려 했어요. 데자뷔로 남지 않길 원합니다. ‘저거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인상을 주는 순간 끝입니다. 그런 절박한 생각이 2만5000여명의 목소리를 연기할 수 있었던 힘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 성우의 세계

타고난 목소리보다 연기력·감정 표현이 더 중요

성우(聲優)는 말 그대로 ‘목소리로만 연기하는 배우’다. 오로지 음성을 통해 인물의 특징과 감정, 시대상 등을 모두 녹여내야 한다.

이 때문에 “목소리만 좋으면 누구든 성우를 할 수 있다”는 통념은 성우에 대한 제일 큰 편견으로 꼽힌다. “타고난 목소리보다 목소리를 이용한 연기력과 발성, 감정 표현과 캐릭터 분석 능력 등을 갈고닦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게 성우들의 공통된 지적이고, 성우 가운데는 연극영화분야 전공자가 많다.

성우는 유성영화와 애니메이션, 라디오와 TV, 광고 또는 각종 안내방송 등 활동 영역이 매우 넓다. 그중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분야는 외국 영화 및 애니메이션 더빙과 내레이션이다. 더빙은 화면 움직임과 목소리가 일치해야 하고, 등장인물의 특징이 목소리를 통해 제대로 전달돼야 하기 때문에 녹음 과정이 매우 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순히 서서 원고를 읽는 것이 아니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울거나 웃으며, 달리는 장면에선 제자리 뛰기를 하는 등 온몸을 동원해 연기한다.

국내엔 약 800명의 성우가 있다. KBS EBS 투니버스 대원미디어에서 1~3년 간격으로 공개채용을 하며, 보통 경쟁률이 수백 대 1에 달한다. 방송사 전속계약 기간이 끝나면 프리랜서로 일한다. 목소리로 존재감을 드러내야 하는 직업 특성 때문에 시청자에게 각인될 비중 있는 역할을 맡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