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재산 보장과 법치, 작은 정부를 핵심으로 하는 자유주의는 ‘개인’을 중시한다. 경제적 자유는 자유주의 최고의 가치다. 사람들이 시장에서 자유롭게 투자하고 생산과 소비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미국의 철학자 마이클 샌델 같은 이들은 자유주의를 공격한다. 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사람 사이의 연대감이나 상호신뢰 없이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져 제 것 챙기기에만 바쁜 차가운 인간들이 사는 세계라는 이유에서다.

그들이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은 개인 대신 공동체를 중시하는 ‘공동체주의’다. 공동체는 가족·마을 공동체에서 볼 수 있듯이 구성원들이 애정, 우정, 유대감 속에서 자신을 희생하며 서로 돕고 사는 세상으로 정의된다.
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공동체주의는 개인이나 기업이 존립할 수 있는 건 사회(공동체) 덕택이라는 논리에 근거한다. 타인의 도움 없이는 개인의 경제적 성공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얻어내려는 ‘권리’보다는 타인에게 갚을 ‘의무’가 중요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예를 들어보자. 야구선수 박찬호의 성공은 박찬호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야구 팬, 야구연맹, 방송산업 등 야구 문화 덕택이고 기업 이윤은 그 기업이 속해 있는 사회의 소비자, 노동자, 원료공급자, 납품업자, 지역사회 등의 덕택이라는 게 공동체주의 인식이다. 그래서 박찬호 선수나 기업들은 당연히 사회적 책임이 있고 그래서 그들이 번 돈의 일부는 사회에 환원하는 게 정의롭다는 것이다.

민 경 국 강원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민 경 국 강원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개인과 기업이 사회의 산물이라는 생각은 전적으로 옳다. 그렇다고 그런 논리를 사회적 책임의 근거로 이용하는 건 옳지 않다. 야구선수는 야구 팬들로부터 받는 것 이상으로 팬들의 욕구를 충족시켰고 또 야구문화에도 기여했다. 기업도 소비자로부터 받는 것 이상으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치를 창출하면서 생산과 유통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보상했다.

그럼에도 사회적 책임의 법적 강요는 개인과 기업의 능력을 국유화하는 우(愚)를 범하는 일이다. 그 책임을 강요하지 않아도 성공한 운동선수들은 자발적으로 기부활동을 한다. 기업도 자발적으로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하며 그 책임을 다한다. 기업 이미지와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다. 삼성전자 베트남 법인이 베트남 중·고등학교에 도서관을 세워주고, SK 해외법인이 정보기술(IT) 교육센터를 건립해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활동이 그렇다.

공동체주의 기업관은 주주, 종업원, 소비자, 지역주민 등의 이익을 위해 그들을 기업의 의사결정에 참여시키는 걸 의무화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다. 그러나 그들을 의사결정에 참여시킬 필요는 없다. 가치창출, 가격, 지역발전 형태로 이미 그들에게 보답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런 제도를 강제로 도입하는 것은 문제다. 그것은 주주재산의 공유화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해당사자들이 기업의 고용·투자 결정에 참여하면 그 결정은 경제논리 대신에 정치논리가 지배한다.

그런 제도가 없다고 해도 기업은 주주 이외의 이해관계자에게도 자발적으로 적절한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그들을 못되게 취급하는 기업은 평판이 나빠져 사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공동체주의는 도시 주변의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도심지 대형 백화점 건설 억제, 농어촌 공동체 보호정책 등을 제안한다. 이 정책들은 공동체주의가 변화와 경쟁을 싫어하는 보수적 성향이 있음을 말해준다. 이 중 지역공동체를 보호한다면서 기업의 이전을 억제하는 정책이 주목된다. 그러나 입지가 좋지 않아 손해가 발생하는 데도 불구하고 이전을 막는 건 지역공동체를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다. 지역공동체가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해 자유로이 기업 유치 경쟁을 하도록 하는 게 지역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최선의 길이다. 이게 자유주의의 핵심인 지방분권화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자국 문화에 고유한 인간관계를 빼앗고 지역의 관습과 전통을 파괴한다는 이유에서 외국인 이민과 세계화에도 반대한다. 그러나 독일의 이민 정책이 보여주듯이 외국인이 이주한다고 해서 자국 문화의 정체성이 손상된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문화의 다양성과 경쟁, 관용이 한 사회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다. 세계화와 자유무역의 부재는 곧 빈곤이라는 역사적 교훈에도 불구하고 자국 문화를 위해 문을 걸어 잠그라는 공동체주의의 주장은 황당할 뿐이다.

자유시장경제가 도덕을 파괴한다는 공동체주의자들의 비판도 옳지 않다. 시장경제는 예의 바르고 공손한 사람들에게 보상한다. 평판이 나쁜 기업은 노동자들이 기피한다. 사후관리가 나쁜 기업의 제품은 소비자들이 외면한다. 시장경제는 불친절하고 무례하고 허풍 떠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그 어떤 사회체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도덕적 행동을 권장하고, 그런 행동을 금전적으로나 비금전적으로 보상하는 게 시장경제다.

사유재산 제도는 과도한 개인주의를 조장하고, 그럼으로써 사회질서를 파괴한다는 공동체주의 주장도 틀렸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면 고립돼 있던 사람들은 사업관계와 같은 공동의 관심을 추구하기 위해 타인들과 인연을 맺고 결속을 다진다. 일상적인 상업관계를 넘어서 종교·사회·오락·예술적 연합으로까지 확장되기도 한다. 그런 공동체 형성을 방해하는 것은 정부의 개입이다. 새로운 공항 건설과 세종시 같은 신도시 건설을 위한 거대 프로젝트는 풀뿌리 공동체 조직의 붕괴를 초래한다. 가정, 이웃관계, 기업, 교회 등과 연결된 인연관계가 뒤헝클어지기 때문이다. 그동안 돈독히 쌓아온 이웃과의 친밀함, 교우관계도 해체된다. 사업관계로 맺어온 인연들이 기업 이전으로 단절된다. 인간을 원자화하는 게 정부 개입이다.

그런 공동체적 관계를 존중하기 위한 첩경은 사유재산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억제하는 것이다. 물론 사유재산권의 수용과 사용은 법에 따라 충분히 보상하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면서 심적 위로와 우정을 교환하면서 살던 분위기가 사라지는 데 대해서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 이쯤에서만 봐도 공동체주의는 공동체적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유주의가 인간을 원자화하고 도덕을 파괴한다는 건 공동체주의의 오해다. 오히려 공동체의 가치 실현과 유지를 위한 최선의 길은 자유주의라는 걸 직시해야 한다.

두개의 자유주의 전통

"도덕·법은 이기심 충족 수단" vs "타인의 인격·재산 보호해야"

자유주의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이기적·합리적·원자적 인간이 사는 세상이라고 공동체주의자들이 비판하는 대상이다. 토마스 홉스의 ‘프랑스 계몽주의’ 전통이다. 밀턴 프리드먼이 대표하는 시카고학파가 계승했다. 공동체주의자들의 이런 비판이 타당하지 않은 자유주의가 있다. 데이비드 흄, 애덤 스미스를 중심으로 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이다. 자유주의 거성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로 계승됐다.

시카고학파는 개인을 사회, 역사, 전통 등과 독립적인 존재로 본다. 도덕과 법은 전적으로 개인의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인간관은 공동체주의자들이 비판하듯이 틀렸다.

인간은 도덕, 관행, 관습 등 사회제도의 산물이라는 공동체주의의 인식은 스코틀랜드 전통에서 볼 때 옳다. 개인은 이기심 덩어리만은 아니다. 애정, 우정, 유대감의 도덕이 인간의 몸에 배어 있다. 그런 인간관도 스코틀랜드 자유주의 전통과 일치한다. 그런 전통의 개인은 예의범절, 직업윤리, 인격·재산존중 등의 규칙을 따르는 행동으로까지 확대된다. 개인들이 이기심을 충족하기 때문에 그런 도덕률을 지키는 게 아니다. 그들이 그걸 지키기 때문에 자신의 목적을 추구할 수 있다.

공동체주의와 스코틀랜드 전통의 차이점을 보자. 첫째, 공동체주의는 공동체를 위해서 사람들이 자신의 물질적·비물질적 재산을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자유주의 전통은 개인들이 타인의 인격과 재산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 의무를 강조한다.

둘째, 공동체주의는 소득의 재분배를 뜻하는 분배정의를 강조하고, 스코틀랜드 전통에서는 행동규칙의 정의로움을 소중히 여긴다. 결국 오늘날처럼 거대한 열린 사회에 적합한 이념은 스코틀랜드 전통의 자유주의라는 걸 직시해야 한다. 잘못된 인간상 때문에 프랑스 계몽주의는 틀렸다. 공동체주의도 가족, 종교, 친목 단체처럼 소규모 사회에나 적합한 이념이다.

민경국 < 강원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