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A씨는 지난해 투자 자금 대출을 받기 위해 시중은행을 찾았다가 퇴짜 맞았을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철렁한다. 차입금이 많이 늘었고 신용등급이 떨어졌다는 게 대출을 거절당한 주된 이유였다. 절박했던 A씨는 지역은행인 부산은행을 찾아 “신용등급이 아니라 잠재력을 봐달라”고 호소했다.

고심하던 부산은행은 대출 심사에 들어갔고 재무제표 외에 노사관계, 지분구조, 대표이사 평판 등을 꼼꼼히 살폈다. 공장 현장조사도 벌였다. 두 달여 심사 끝에 부산은행은 A씨에게 10억원을 대출했다. 부산은행 관계자는 “공장에 찾아갔을 때 기자재가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고 몇몇 직원은 주차장 입구에 떨어진 휴지를 줍기도 했다”며 근무기강과 평판을 주로 봤다고 밝혔다.

◆숫자가 아니라 평판이 중요

지방은행들이 이른바 ‘관계형 금융’ 효과를 보고 있다. 관계형 금융은 재무제표 위주의 정량평가 대신 최고경영자(CEO)의 성실성과 도덕성, 사업역량에 대한 주변 평판 등 정성적인 정보를 토대로 대출 여부를 심사하는 방식이다. 각종 재무정보를 우선시하는 시중은행과 달리 지방은행들은 관계형 금융을 앞세워 지난해 저금리 상황에서도 순이익을 20% 넘게 늘렸다.

부산·경남·대구은행 등은 2000년대 초반부터 관계형 금융 전문인력을 양성해 영업점에 배치했다. 지난해 10월 말 기준 국내 은행의 관계형 금융 대출잔액은 1조8000억원으로 이 중 절반이 지방은행 대출이다.

지방은행의 관계형 금융은 대출에만 국한한 건 아니다. 때로는 기업의 재무상담가, 투자파트너 역할도 맡는다. 대구은행과 인터불고그룹이 그런 사례다. 인터불고그룹은 지난해 7월 주력 계열사인 호텔인터불고대구 때문에 속앓이를 했다. 호텔인터불고대구가 국민은행에서 빌린 400억원의 만기가 다가왔는데 갚을 길이 막막해서다. 시중은행들은 만기 연장과 추가 대출이 어렵다고 발을 뺐다.

그때 대구은행이 손을 내밀었다. 박인규 DGB금융 회장 겸 대구은행장은 권영호 인터불고그룹 회장을 찾아가 “대출 상환자금을 빌려줄 테니 호텔인터불고대구를 팔아 다른 13개 계열사로 유동성 위기가 번지는 걸 막자”고 제안했다. 인터불고그룹은 지난해 말 호텔인터불고대구를 매각한 뒤 재무구조 개선에 힘을 쏟고 있다. 박 회장은 “자금 지원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15년 가까이 인터불고그룹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본 만큼 조금 도와주면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것으로 봤다”고 말했다.

◆순이익 규모 늘린 지방은행

JB금융 자회사인 광주은행과 전북은행도 관계형 금융을 앞세워 수도권 영업점을 빠르게 늘렸다. 두 은행의 수도권 점포는 40개에 달한다. 김한 JB금융 회장 겸 광주은행장은 “수도권에 있는 지역 출신 상공인들에게 최상의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수도권 자금을 끌어들여 광주·전남 중소기업 지원에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관계형 금융은 지방은행 실적에도 도움이 되고 있다. 지난해 3분기 충당금 적립 전 영업이익 대비 대손비용은 지방은행이 33.6%로 시중은행(40.6%)보다 낮았다. 부실대출이 줄면서 지방은행의 수익성도 시중은행을 압도했다. 지난해 시중은행의 당기순이익(1~3분기 누적)이 전년 동기 대비 19.3% 감소한 반면 지방은행 순이익은 22.9% 늘었다. 성세환 BNK금융 회장 겸 부산은행장은 “(시중은행과 달리) 지방은행은 십수년씩 한 기업과 거래하면서 재무상태에서 드러나지 않는 기업의 성장 가능성, 위기관리 능력 등을 파악할 수 있다”며 “관계형 금융은 수익성 확보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 관계형 금융

신용등급과 재무비율 등 정량 정보 외에 지속적인 거래와 접촉, 관찰, 현장방문 등을 통해 얻은 정성적 정보를 대출심사 등에 이용하는 금융기법.

김은정 기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