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코스 밟아온 여성 리더, 클라우드·인공지능 신무기로 흔들리는 'IT 공룡' 되살릴까
2011년 10월 한때 세계 최대 컴퓨터회사였던 IBM은 당시 회사를 이끌던 새뮤얼 팔미사노의 뒤를 이을 새 최고경영자(CEO)를 발표했다. 이름은 ‘버지니아 로메티’. 줄여서 ‘지니 로메티’로 불리는 금발의 여성이었다.

시장의 반응은 엇갈렸다. 기술 분야에 정통한 이들에게 지니 로메티는 익숙한 이름이었지만, 화려한 대외활동과는 거리가 멀었던 탓에 ‘누구냐’는 이들이 더 많았다.

대표적 여성 CEO

1911년 설립돼 105년이 된 IBM의 CEO로 임명되며 로메티는 단숨에 ‘세계를 이끄는 여성 리더’ 반열에 올랐다. 글로벌 주요 기업의 여성 CEO 수는 적다. 한 줌밖에 안 된다. 제록스의 우르술라 번스, 펩시코의 인드라 누이, 듀폰의 엘런 쿨먼, 휴렛팩커드(HP)의 멕 휘트먼 정도다. 포천은 2012년 그를 ‘최고 영향력 있는 여성 기업인’으로 뽑았다.

그러나 전임자인 팔미사노는 “‘지니’가 여성이라서 무슨 진보적 사회정책과 관련해 뽑힌 것이 아니다. 될 만한 사람이니까 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팔미사노는 로메티를 애칭 ‘지니’라고 불러서 그가 동료이자 친구임을 드러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팔미사노의 ‘업적’으로 꼽히는 것 중 상당수는 사실상 로메티의 작품이다. 2002년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 컨설팅 부문을 35억달러에 인수하고 2005년 개인용컴퓨터(PC) 사업을 중국의 레노버에 매각하면서 IBM은 컴퓨터 회사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컨설팅을 아우르는 통합 솔루션 회사로 성격을 바꿨다. 팔미사노는 “PwC 인수 작업을 실제로 지휘하고, 그것이 제대로 돌아가게 한 사람도 지니”라고 했다. 조지 콜로니 포레스터 리서치 CEO는 뉴욕타임스(NYT)에 “로메티는 성과와 카리스마를 결합하는 사람”이라며 “(독립성이 강한) PwC의 컨설턴트들을 IBM 문화에 융합시키는 것을 오케스트라 단장처럼 지휘했다”고 평가했다.

자신감 넘치는 엘리트

가까운 거리에서 보면, 로메티는 하루아침에 나타난 스타가 아니다. 어릴 때부터 출중한 면모가 있었다.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컴퓨터과학 및 전기공학을 전공(1975~1979)했다. 그 시절엔 드문 여학생이었지만, 남학생들을 압도하는 재능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조용하고 깔끔한 성격의 차분한 여대생이었다”고 했지만, 리더십도 강한 편이었다. 엘리트 여대생들의 사교클럽인 ‘카파 카파 감마’에서 활동했고 회장까지 지냈다.

졸업 후엔 제너럴모터스(GM)인스티튜트에 입사했다가 2년 후 IBM의 시스템 엔지니어로 옮겼다. 30년 넘게 IBM에서 일한 베테랑이다. 1991년 IBM컨설팅 그룹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이후 IBM 내 여러 요직에서 뚜렷한 성취를 이뤘다. 자신감을 갖고 밀어붙이는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그는 “성장과 안락함은 같이 갈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포천의 한 행사에 참석해서는 “바꿀 수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추진력이 강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해온 삶이 배어나는 대목이다. 활동적인 성격이어서 남편인 마크 로메티와 함께 스쿠버다이빙이나 골프를 즐긴다.

실적 부진에 압박도 받아

그러나 막상 CEO가 된 뒤 로메티의 실적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하다. 실적이 계속 악화하면서 주가가 떨어졌다. 2011년 이후 매출은 계속 하락세다. 2014년에는 순이익률도 하락했다. 특히 메인프레임·서버·스토리지 등을 판매하는 시스템·테크놀로지 사업부 매출이 급감했다. 작년 10월은 최악이었다. 14분기 연속 매출이 감소했다.

도은진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또 한 번의 도약이 절실한 IBM’ 보고서에서 미국 100대 기업 시가총액 중 IBM이 차지하는 비중은 1980년대까지는 80%에 육박했고 1990년대엔 20%까지 떨어졌지만 여전히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는데 지금 IBM의 비중은 미미하다고 지적했다. 알파벳(구글 지주회사), 페이스북 등 새로운 IT 회사들이 치고 나오는 가운데 IBM은 공룡처럼 늙고, 쇠퇴한 것처럼 보인다.

외부 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달러가 강세를 보이고, 신흥국 경제가 둔화세를 보이고 있다. 로메티는 작년 3분기 실적 발표에서 전년 동기 대비 중국 매출이 17% 줄었고, 중국을 포함한 브릭스(BRICs) 국가 매출이 30% 감소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클라우드로 급변하는 IT 시장 환경에서 IBM이 적응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시장은 지금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이 장악하고 있다.

클라우드·인공지능 등 신사업 주력

로메티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지난해 2월 애널리스트와의 연례 모임에서 “클라우드·애널리틱스·모바일·소셜·보안기술 부문에 40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로메티는 이들 사업을 ‘전략적으로 긴요한 분야’라고 통칭했다. 특히 온라인 서비스인 클라우드를 강조했다. 이들 사업의 매출이 2014년에는 250억달러로 전체의 27%에 불과했지만 2018년에는 전체의 40%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2012년 그가 무려 10억달러를 투자하기로 결정한 인공지능 ‘왓슨’도 그의 큰 조력자다. 그동안 돈을 버는 존재라기보다는 뛰어난 기술력을 뽐내는 ‘쇼’의 주인공이었던 왓슨은 이제 본격적으로 상업화 단계에 들어갔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방대한 의료 관련 지식과 임상시험 결과 등을 수집하고 분석해서 환자를 위해 가장 좋은 치료법이 뭔지 알려주고, 제약회사에 어떤 신약을 개발해야 하는지 콕 집어내주는 ‘왓슨 헬스’에 관해 자세히 보도했다. 존 켈리 IBM 리서치부문 대표 겸 부사장은 FT에 “왓슨 관련 매출의 증가 속도는 IBM 전체를 통틀어 가장 빠르다”고 말했다.

지난해엔 저가형 서버 사업인 시스템X를 중국 레노버에 매각하고 반도체·제조부문사업도 글로벌파운드리에 넘기는 등 구조 개혁도 단행하고 있다. 왓슨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민간 일기예보 업체 데이터자산을 20억달러에 사들이기도 했다.

문제를 해결할 ‘열쇠’는 보이는데, 열쇠를 문고리에 넣고 돌릴 실행력이 있는지가 관건인 상황이다.

생각보다 로메티의 지지자는 많다. NYT는 최근 IBM의 인공지능과 클라우드 컴퓨팅 등이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IBM의 주요 주주인 워런 버핏도 그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고 있다. 포브스는 IBM의 하락세에도 불구하고 버핏이 IBM 주식을 되레 작년 3분기에 매입한 것에 관해서 보도하며 IBM이 지금까지 축적한 혁신 역량, 가시화되는 신사업 성과, 브랜드 가치, 주요 기업과의 파트너십 등의 저력이 있다고 언급했다.

로메티의 모토는 “생생한 상태를 유지하라(stay fresh)”다. IBM에 활력을 불어넣는 과업을 그가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을지에 IT 업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