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글로벌 세일 전쟁
만들면 팔리는 시절이 있었다. 20세기 전반까지가 그랬다. 판매자(seller) 시장이었다. 그러다 대량생산으로 공급이 넘치기 시작하면서 사는 사람이 고르는 구매자(buyer) 시장이 됐다. 이 두 시기를 피터 드러커는 각각 제조업의 시대와 마케팅의 시대로 구분해 불렀다. 만드는 것보다 파는 것이 중요한 시대는 이미 20세기 중반 시작된 것이다.

많이 팔리게 하려면 누가 주도하든 대형 할인 이벤트를 만드는 게 효과적이다.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는 그렇게 탄생했다. 블랙프라이데이는 추수감사절(11월 넷째 목요일) 다음날이다. 한 가게 연 매출의 70%가 이때 달성돼 장부가 흑자로 돌아선다고 해서 블랙(black)이란 단어가 붙었다고 한다. 1924년 메이시백화점이 이날 세일을 한 것을 최초로 본다.

2005년부터 미국에선 이날과 이어진 이벤트로 ‘사이버 먼데이’를 시작했다. 추수감사절 다음주 첫 번째 월요일이다. 블랙프라이데이를 놓친 사람들에게 온라인 할인판매를 하는 날이다. 요즘은 미국뿐 아니라 영국 독일 일본 등 10여개국에서 판매 이벤트로 활용하고 있다.

더 유서 깊은 쇼핑 이벤트로는 영국의 ‘박싱데이’를 들 수 있다. 중세 시대 봉건 영주들이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고 난 다음날 수고한 일꾼들에게 세경이나 음식, 선물 등을 상자에 담아 준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영연방 국가는 물론 독일 스웨덴 등도 크리스마스 다음날(12월26일)을 공휴일로 정해 연휴로 쉬고 있다. 박싱데이 때는 평소보다 50% 이상 싸게 살 수 있다. 블랙프라이데이, 사이버먼데이, 박싱데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최근엔 이런 이벤트를 겨냥해 신제품을 내놓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원래 재고 처리 세일이었다는 점이다.

지난 11일 중국 최대의 쇼핑 이벤트인 광군제가 기록을 쏟아내며 끝났다. 주최사인 알리바바는 이날 하루 16조5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블랙프라이데이와 사이버먼데이를 압도하는 기록이다. 원래 광군(光棍)은 ‘빛나는 몽둥이’라는 뜻으로 독신자를 가리킨다. 1이 네 개나 겹친 11월11일을 언제부턴가 ‘독신자의 날’로 불렀다. 알리바바는 2009년 이날을 독신자들에게 선물을 사주는 날로 바꿨다.

해외 사이트에서 온라인으로 직접 사는 ‘직구’가 유행하면서 쇼핑에서 국경은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우리의 경쟁상대는 옆 가게가 아니라 광군제요 블랙프라이데이일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제조업의 시대와 마케팅의 시대를 지나 글로벌 세일전쟁의 시대를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권영설 논설위원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