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정치는 시장보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일까. 지금 여의도에서는 경제문제를 포함한 세상만사를 정치 논리로 재단하고, 국회의 입법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정치 만능주의, 입법 만능주의가 도를 넘고 있다. 또 국회에서 만든 법률 중에는 ‘OO 육성에 관한 법률’ ‘OO 개선에 관한 법률’이 많은데, 이들 대부분은 영업의 자유와 가격에 대한 규제, 경쟁을 제한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소비자 간 보조금 차별을 금지함으로써 소비자들로부터 원성을 사고 있는 ‘단통법’ 또한 그 본명은 ‘이동통신 단말장치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이다.

공익을 빌미로 규제 쏟아내는 '정치 만능주의'…견고한 '삼각 철옹성'의 사익추구 경계해야
사실이 이렇다 보니 전문가들 사이에 ‘OO 육성법’은 ‘OO 억압법’으로, ‘OO 개선법’은 ‘OO 개악법’으로 의심부터 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마저 떠돈다. 그래도 정치권은 이에 아랑곳없이 시장의 불완전성, 불공정성을 공격하면서 시장실패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접근, 입법적 제한의 확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정치 논리가 시장 원리보다 훨씬 합리적이고 공정하고 효율적이라면 이런 주장도 일리가 있겠지만 과연 그럴까.

여기에 대해 영국의 경제학자며, ‘애덤 스미스 연구소’를 설립한 이몬 버틀러는 “정치적 의사결정은 시장의 선택보다 비효율적이다”고 단언한다. 흔히 정치는 다수결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어 공정하고 민주적일 것으로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보면 첫째, 시장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지만 정치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다수가 선택했다는 이유로 강제당해야 한다. 심지어 옳은 의견이 다수결에 의해 배제되고 틀린 의견이 채택되는 불합리한 경우도 생기는 게 정치다.

둘째, 정치에서 한 표는 최종 결과에 미치는 영향력이 미미하다. 유권자도 이를 알기 때문에 투표에 앞서 사람과 공약을 열심히 분석하는 등의 성가신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가격과 품질을 꼼꼼히 따져보고 결정하는 것과 달리 정치는 대개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의사결정이 이뤄진다.

셋째, 시장에서 소비자는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사고 맘에 드는 게 없으면 구매를 안 해도 된다. 그러나 정치에서는 최악(最惡)을 피하기 위해 최선(最善)을 포기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내 맘에 드는 인물이지만 선거에서 채택될 가능성이 없으면 사표(死票)를 피하기 위해 차선(次善) 또는 차악(次惡)의 인물을 선택하는 게 정치다.

넷째, 시장 선택에서 비용과 책임은 전적으로 나의 몫이지만 정치에서는 비용과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있다. 더 많은 복지를 요구하면서 세금은 회피하고, 오늘 빚을 내서라도 풍족히 쓰고 그 부담은 다음 세대에 떠넘기려는 게 정치의 속성이다.

다섯째, 시장에서 소비자는 자신이 원하는 물건만을 골라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지만 정치에서는 불가능하다. 유권자는 국방, 경제, 사회, 복지 전반에 대해 패키지로 선택하도록 강요당한다. 따라서 시장과 달리 정치에서는 유권자가 원하는 최선의 정책조합을 얻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치 원리가 시장 원리에 비해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이유는 또 있다. 시장과정에 대한 정치 또는 정부 개입을 촉구하는 규제론자들이 흔히 간과하는 사실 중의 하나는 공직자 또한 우리와 같은 경제인이라는 사실이다. 정치인과 공무원이 공직자라고 해서 사심은 없고 공공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천사’가 아니다. 정치인이 공익의 기치를 내건다고 해서 이를 액면 그대로 믿는 것은 환상이다. 미국의 경제학자 고든 털록이 ‘지대(地代)추구이론’을 통해 지적했듯이 공직자들은 규제의 제정, 집행을 통해 더 쉽게 더 강하게 ‘지대’를 챙길 수 있다. 이들이 챙기는 지대는 규제 완화나 규제 배제 등의 특혜를 제공하는 대가로 받는 돈일 수도 있고, 정치적 영향력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규제가 많고 복잡할수록, 정부 규모가 클수록 공직자가 챙길 수 있는 지대의 기회도 그만큼 많아진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역대 정부마다 규제개혁을 강조했어도 성과가 미흡한 것은 어찌 보면 이와 같은 지대추구 정치논리 때문일 것이다. “규제개혁이라 쓰고 일자리 창출이라고 읽는다”고 하면서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 규제개혁을 독려했지만 규제총량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다시 털록의 표현을 빌리면, 규제의 신설·강화·폐지 권한을 독점하고 있는 정치권, 규제의 집행권한을 행사하는 규제당국 공무원, 규제의 혜택을 누리는 사업자 단체 사이에는 지대추구의 견고한 ‘삼각 철옹성’이 형성돼 있어 규제개혁이 어렵다고 하는데 우리가 바로 그런 상황이 아닌가 싶다.

이와 같이 시장과정에 대한 정치 또는 정부의 개입은 의사결정의 제도적 흠결, 공직자의 지대추구 유인 때문에 비효율, 불합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내포하고 있다. 정치에서는 국민 개개인이 원하는 것과 다른 선택이 채택되기도 하고, 정치적 선택의 결과가 내가 원한 것과 다르다고 해서 이를 거부할 자유도 허용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정치적 선택의 결과가 나중에 순기능보다는 부작용이 많은 것으로 밝혀져도 정치인-규제관료-이익단체의 지대추구 철옹성 때문에 되돌리기도 어렵다. 이와 달리 시장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들만 모아서 나의 비용과 책임 아래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시장은 정치보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며 공정하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 이후 많은 학자가 나라가 부강해지고 국민이 잘살려면 시장의 역할을 확대하고 정부의 역할을 줄여야 한다고 줄기차게 강조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경제의 정치화(politicization) 현상은 갈수록 심화, 확대되고 있다. 모든 생산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소비에 있다. 스미스가 말했듯이 생산자의 이익은 소비자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경우에만 중시돼야 한다. 그러나 정치인은 국민 모두가 소비자임에도 소비자 편에 서는 것은 표를 얻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 같다. 기술발전, 소비자 기호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사업자는 시장 원리에 의하면 창조적 파괴의 대상이지만 국내의 지대추구 정치 구조 아래에서는 법으로 사업영역을 보호해줘야 하는 대상으로 부상한다. 이와 같이 소비자인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사업자 사이의 소득 재분배를 우선하는 지대추구 정치는 생산적 기업가 정신을 위축시키는 원인이자, 시장경제의 발전에 치명적인 위협요인이 될 것이다.

■ 경제의 정치화
정치의 경제개입 갈수록 심화…정치인 신뢰도, OECD 26위 불과


경제의 정치화는 가격의 신호에 따라 수요와 공급이 결정돼야 할 경제 사안을 다수결의 정치 논리로 재단하고 개입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비유하자면 KBS 2TV의 ‘개그콘서트’ 중 ‘횃불 투게더’라는 코너가 있다. 손님의 (때로는 터무니없는) 불만 제기에 가게주인이 응하지 않으면 손님들이 모두 일어나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시위를 하면서 요구를 관철하는 내용이다. 웃자고 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장거래 문제를 다수의 폭압적 정치 논리로 해결하려는, 한국 사회에 만연해있는 과잉 정치화 현상을 풍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씁쓸한 여운이 남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 같다.

불행하게도 경제의 정치화 현상은 정보통신기술의 혁신과 보급에 힘입어 계속 확산될 전망이다. 누구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정부가 해결해줘야 할 문제로 호소하고 여기에 많은 사람이 호응하면 설령 시장원리나 공익에 반하는 일이라도 맞장구치는 게 정치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생리를 잘 아는 이익단체나 압력단체는 케이블TV 같은 매체를 적극 활용, 경제의 정치화 현상을 더욱 부추기려 할 것이다.

그러나 경제 문제를 정치화하는 것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치명적인 위협요인이다. 이를 막으려면 유권자인 국민이 먼저 정치원리는 시장원리보다 효율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다는 점, 그리고 공직자가 공익만 추구한다는 가설은 이론적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공직자도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이유가 있다.

2015년도 세계경제포럼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한국 정치인에 대한 국민 신뢰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26위다. 지수로는 OECD 평균치에 비해 약 35%나 뒤떨어져 있다. 공무원도 다르지 않아 공무원의 의사결정에 대한 신뢰 또한 26위에 그치고 있다. 공직자에 대한 신뢰는 한국의 경제규모로 볼 때 적어도 OECD 평균은 돼야 하지 않겠는가.

황인학 <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