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문제가 어디 국사 교과서 하나뿐인가
“현재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이 사용하는 2011년판 한국사 교과서는 북한 교과서를 보는 듯하다.” 교육부 고위 관료가 며칠 전 기자 브리핑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누구를 탓하겠는가. 2004년 7차 교육과정이 시작되면서 왜 갑자기 ‘한국 근·현대사’ 과목이 신설됐는지, 누가 국사 교과서를 국정에서 검정으로 바꾸었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검정 체제로 바뀌었으면 감수와 편수 절차는 까다로워야 한다. 단순한 통과의례를 어떻게 검정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한국사 교과서의 좌편향을 방조한 것은 결국 교육부다. 그 교육부가 여당이 국정화의 총대를 메자 이제 와 남 얘기하듯 북한 교과서를 운운하고 있으니 말이다.

6·25의 책임은 남북 모두에 있고 분단의 책임은 남한에 있다는 악의적 내용은 기본이다. 남한과는 달리 북한은 무상 몰수·무상 분배의 정당한 토지개혁이 이뤄졌다는 내용부터 북한의 주체사상을 그대로 소개한 교과서까지 이루 다 소개할 수 없을 정도다. 수정 명령으로 지나친 왜곡은 차단했다지만 검정 교과서의 내용을 죄다 뜯어고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 아이들이 그런 교과서로 왜곡된 역사를 배워온 게 벌써 10여년이다.

야당 의원,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교사, 좌편향 사학계, 좌파 단체들은 다양성이 무너진다며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결사적으로 반대한다. 물론 국정화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다양성을 위해 도입한 검정제가 오히려 다양성을 해친다면 답은 달라져야 한다. 대한민국 역사를 긍정적으로 서술했다는 교학사 교과서를 이들이 조직적으로 공격해 교재 채택률을 0%에 가깝게 만들어 놓은 것이 한국사 교과서 사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교학사 교과서는 나오지도 않았는데 유관순을 깡패로, 김구를 테러리스트로 표현했다는 날조된 보도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횡포에 뭇매를 맞아야 했다. 교학사 교과서 채택을 포기할 때까지 학교에 집요하게 가해진 협박과 소란은 현장 교사들을 분노에 떨게 했고, 야당 의원의 무소불위 표적 사찰은 교과서 집필진을 불안에 떨게 했다. 국정화를 권위주의의 산물로 비난하는 이들이 보여준 행태는 그 어떤 권력과 억압도 따라올 수 없는 전체주의였다.

미국도 역사 교과서로 몸살을 앓은 적이 있다. 20여년 전 얘기다. 조지 부시 대통령의 지시로 역사 교육을 위한 표준서를 개발한 게 1994년이었다. 그러나 내용이 일방적이었다. 미국이 그토록 자랑하는 헌법은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다. 국민의 자유와 삶의 질을 향상시켜온 노력은 배제된 채 매카시즘이나 대공황 같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어두운 과거만이 교과서를 메웠다. 조지 워싱턴과 같은 ‘건국의 아버지’들은 이름만 걸쳤을 뿐, 인디언 학살과 노예제의 잔혹사만이 강조됐다. 미국의 역사가 좌파들로부터 위협받고 있다는 경고가 잇따랐다.

미국의 보수는 적극 대응했고 논쟁은 의회로 넘어갔다. 상원은 99 대 1로 역사표준서를 반대했다. 공화당 52명, 민주당 48명으로 양분돼 있던 상원이 왜곡에 초당적으로 대응한 결과였다. 세계 자유와 번영을 증진시킨 미국 역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의회 정신이 살아 있는 미국이 부러운 이유다.

하긴 좌편향 교과서가 어디 한국사뿐인가. 사회는 물론이요, 국어도 멀쩡하지 않다. 6차 교육과정 이후 교과서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와는 거리가 멀다. 반(反)시장 경제와 반기업 정서를 저변에 깔고 산업화를 부정한다. 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 반미 정서를 부추긴다. 기업은 강자이고, 노동자는 무조건 약자라며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를 묻는다. 성장은 뒷전이고 복지와 분배만을 강조한다. 자본주의를 악으로 가르치면서 몰락한 사회주의의 평등주의를 칭송하는 것이 지금의 교과서다.

배울수록 삐뚤어진다. 이들이 대학을 가고, 사회에 진출한다. 우리의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는지.

정부가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단일 교과서 사용’ 또는 ‘교과서 정상화’로 표현하기로 했다고 한다. 정상화라는 표현이 옳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말기를 바란다. 정상화는 모든 교과서에 필요하다.

김정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