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가 노력과 실력이 아닌 운(運)에 의해 성패가 갈리는 ‘추첨공화국’이 돼간다는 한경 보도(9월16일자 A1, 3면)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국공립 유치원, 국제중, 자율형 사립고 전형에서부터 의무경찰·카투사 입대, 관공서의 아르바이트나 기간제 근로자 선발, 정당 선거인단 구성, 공공택지 분양에까지 추첨이 남발된다는 것이다. 생애주기마다 중요한 결정이 운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심지어 종교계에서조차 제비뽑기로 입후보자를 정할 정도다. 온 나라가 제비뽑기에 몰입하는 꼴이다.

이런 현상은 경쟁의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낮은 사회의식과 잡음은 무조건 피하고 보자는 정부의 무책임이 낳은 합작품이다. 물론 인맥·권력을 이용한 청탁이 끊이지 않아 설사 공정하게 선발해도 특혜 시비가 벌어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로 인해 근거 없이 불신이 만연해 한번 불만이 제기되면 별다른 고려 없이 추첨제로 무마하는 일이 다반사다. 저신뢰 사회의 전형적인 특성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운에 맡기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일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추첨은 형식적 기회균등을 제공할 수는 있다. 누구나 n분의 1의 확률을 갖기에 결과에 대한 승복 가능성도 높아진다. 그러나 제도가 추구하는 목표나 의도에 따라 결정 방법도 달라져야 정상이다. 툭하면 복불복(福不福)식 추첨으로 바꿔 시빗거리만 없애면 그만이라는 행태는 결코 정의로울 수 없다. 정의의 원칙은 ‘그것을 갖기에 가장 합당한 사람이 가지는 상태’(아리스토텔레스)일 때 달성할 수 있다. 예컨대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 합격하고, 노력한 사람이 성취하며, 전문적 식견이 있는 사람이 과업을 책임지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 복불복 선호가 만연한 것은 민주주의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자유와 권리의 이면에 책임과 의무가 있고, 진정한 기회균등은 무임승차를 걸러내는 것이어야 마땅하다. 노력하지 않고 실력이 없어도 n분의 1의 확률을 요구하고 모든 것을 운과 재수 탓으로 여기게끔 제도가 설계돼서는 곤란하다. 운이 지배하는 그런 사회로 가자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