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국내총생산(GDP)은 한 나라의 경제 규모를 나타내는 지표다. 소비, 투자, 정부지출 그리고 수출에서 수입을 뺀 순(純)수출로 구성된다. 1930년대에 만들어진 지표인데 한 나라의 국력·명성을 평가하는 데 유용하게 쓰인다. 그 규모에 따라 정권까지도 교체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GDP를 ‘경제지표의 왕’이라고까지 부르는 이유다.

경제적 번영 이끄는 건 소비가 아닌 생산…중간재 반영 않는 GDP집계 '치명적 오류'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GDP는 시장경제의 작동원리를 오해하고 시장에 대한 정부간섭을 부추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를 대체할 지표 개발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점증하고 있다.

정부지출을 생산적이라고 보는 간섭주의 시각부터 잘못이다.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고 병원, 도로, 항만 같은 사회간접자본(SOC)을 건설하는 등 제한된 정부활동을 위한 지출은 사적 경제에 직접 도움이 된다. 그 이상의 정부지출은 경제에 해를 끼치기 일쑤다.

수입은 경제에 편익을 주지 못한다는 이유에서 순수출만을 고려하는 것도 GDP 집계의 치명적 오류다. 수출은 좋고 수입은 나쁘다는 잘못된 중상주의 사상이 깔려 있다. 수출의 궁극적 목적은 국내에서 생산하기 어려운 상품을 수입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GDP 집계에서 초점을 맞추는 ‘최종소비재 지출’이다. 빵을 만들 때 사용되는 밀, 밀가루, 빵틀 또는 승용차 생산에 투입되는 강판, 바퀴 같은 중간재는 이중계산을 피한다는 이유로 집계에서 빠진다. 이런 방식으로 계산한 결과는 대단히 흥미롭다. 소비가 경제활동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게 나타난다. 대체로 미국은 70%, 독일, 한국도 60%로 추산된다. 그런데 경제 현실이 정말로 그런가.

원료, 반제품, 기타 생산수단 등 중간재에 대한 지출이 최종 소비지출을 훨씬 능가하는 게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다. 자본재에 대한 지출이야말로 진정으로 경제적 번영을 안겨주는 생산적 활동이다. 자본재 지출을 감안하면 소비는 전체 경제활동의 30% 정도를 차지하고 중간재 지출, 즉 기업의 투자지출이 60% 이상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이 수치는 곧 자본주의적 생산 구조의 발전을 반영한다.

주목할 점은 개념적 언어에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들어 있고 그래서 사고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GDP도 예외가 아니다. GDP 집계에서는 소비 비중이 큰 나머지 소비가 생산을 이끄는 것처럼 사람들을 믿게 한다. 이런 믿음은 ‘수요가 공급을 창출한다’는 케인스의 소비경제 통념을 지원하고 강화했다. 수요 부족 탓에 경제가 위축된다는 논리다. 그래서 ‘소비는 미덕이고 절약은 악덕’이라는 것이다. 정치권이 소비 증대를 위한다며 각종 정책수단을 동원하는 것도 이런 인식에서 비롯된다. 정부예산을 확대 지출하고 임금 인상을 유도해 가계소득도 늘려 소비여건을 개선하려고 한다. 개별 소비자의 씀씀이를 늘리도록 은행돈을 낮은 금리로 빌려주고 주식·부동산시장의 활성화도 부추긴다.

이렇게 정부가 소비를 촉진하면 단기적으로는 특정 소비재의 판매와 생산이 늘어난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돈을 마구 쓴다면 늘어나는 건 신용카드 청구서일 뿐이다. 저축을 통해서만 가능한 설비증설, 신소재 개발, 병원 설립 등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케인스의 소비촉진 정책은 기껏해야 소비재를 판매하는 멋들어진 백화점과 쇼핑몰만 늘어나게 할 뿐이며, 이로 인해 생산 구조는 당장의 소비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생산에 편중되는 단순생산 구조로 전환된다. 그 결과 먼 장래에 혜택을 주는 중간재(자본재) 생산 구조는 정체되거나 파괴된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소비재와 자본재 생산을 가능하게 하고, 전대미문의 경제적 번영을 가져온 것은 현재의 소비지출이 아니라 미래소비를 위한 투자 덕분이다. 따라서 소비가 아니라 생산이 먼저라는 시장논리를 주목해야 한다. 노동자가 일하러 가고 생산자가 이윤을 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소비자들은 지출을 시작한다. 생산이 소비의 원인인 것이다. 농부가 곡물을 재배해 팔아야 그 판매수입으로 아이들 옷도, 교육용 비디오도 구매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이 생산에 종사하는 이유는 자신의 삶과 복지에 필요한 재화를 소비하기 위해서다. 소비보다 생산이 먼저라는 것은 경기변동에서도 또렷하게 드러난다. 경기침체가 시작되면 소비보다 먼저 생산이 줄어든다. 경기가 회복되기 시작하면 생산이 증가하고 소비가 뒤따른다. 풍년이 들면 농부가 새 농기계를 사고 여행도 즐길 수 있지만 흉년이 들면 그런 여행상품을 소비할 수 없듯이 산출이 많아야 소비지출도 늘어난다. 경제성장이 풍요로운 소비생활을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경제를 이끄는 건 소비가 아니라 생산이라는 시장원리는 프랑스 경제학자 장 바티스트 세이(1767~1832)가 발견했다. 그의 이름을 딴 게 ‘세이의 법칙’이다. ‘세이의 생산경제’가 자본주의 원리라는 것은 미국, 일본, 독일 등에서 활용하는 경기선행지수가 입증한다. 이 지수는 소비활동보다 신규자본재 구입, 건설 수주·기계 수주액처럼 시장의 역동성과 번영의 산실인 중간재생산·투자활동과 관련돼 있다

오늘날의 상품들은 20~3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종류나 수량이 많은데,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정부가 소비 진작을 위해 통화를 풀거나 재정지출을 늘려서가 아니다. 소비자의 소비능력은 오로지 경제성장에서 나온다. 성장의 열쇠는 기계, 설비 같은 중간생산물인 자본재다. 일자리도 만들고 생산성과 소득을 늘리는 자본재는 개인들의 시간선호에 따른 저축을 통한 투자의 결과다. 자본재의 생산·이용이야말로 성장 추진력인 기업가 정신이 강력하게 발휘되는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이다. 유감스럽게도 GDP 집계에서는 버림받는 신세다.

이쯤에서만 봐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라고 격찬받는 GDP 개념은 적절치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소비가 아니라 생산, 저축과 생산성이 경제의 추진력이라는 시장논리를 왜곡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왜곡의 치명적 결과는 정부개입이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정부부채 누적, 인플레이션, 경제침체는 이런 정부개입 탓이라는 걸 직시할 필요가 있다.

■ 생산 중시하는 ‘세이의 법칙’
소비는 경제성장의 결과물…GDP 대신 ‘총산출’ 도입을


장 바티스트 세이
장 바티스트 세이
‘세이의 법칙’은 소비가 아니라 생산이 먼저라는 아주 간단하지만, 복잡한 소비·생산과정을 환히 밝혀준다. 그럼에도 이 법칙은 아직까지도 무시당하고 있다. 그에 대한 왜곡된 해석 탓이다. 현실에 적합한 이 법칙을 ‘공급은 스스로 자신의 수요를 창출한다’는, 즉 냉장고를 생산하면 자동으로 모두 판매된다는 뜻으로 왜곡해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 주역이 케인스였다.

흥미롭게도 일각에서는 원래의 세이의 법칙을 살려서 새로운 경제지표를 개발, 국내총생산(GDP) 개념을 대체하려는 노력이 있다. 소비활동이 아니라 생산활동에 초점을 맞추는 ‘총산출(gross output)’ 개념이 그것이다. 총산출은 원재료를 포함하는 중간재 집계를 중시한다. 그래서 총산출은 항상 GDP보다 크다. 미국 상무부가 지난해부터 공식적으로 이 집계 방식을 이용하고 있다.

세이가 지적했듯이 소비활동은 경제성장의 효과일 뿐 원인이 아니다. 소비를 조장하는 정부는 별로 좋은 정부일 수 없다는 세이의 생각과 일치되는 게 총산출 집계 개념이다. 소비능력은 생산 증가에서 나오기 때문에 총산출 집계가 중시하는 것은 경제성장을 결정하는 기업가 정신과 혁신적 경제활동이다. 그런 경제활동을 반영하는 것이 중간재를 뜻하는 자본구조다.

불경기는 소비 부족 탓이라는 케인스주의 대신에 경기변동도 생산에서 비롯된다는 세이의 생각을 반영한 게 총산출 개념이다. 경기상승·하강에 대단히 민감한 것도 총산출의 장점이다. 금융위기가 발발한 2008~2009년 미국의 GDP는 2% 하락한 반면 총산출은 8% 감소했다는 통계는 총산출 개념의 현실 적합성을 잘 말해준다. 총산출 개념에는 경기변동이 자본구조의 왜곡에서 비롯된다는 생각도 깔려 있다.

성장과 번영을 위해 필요한 것은 생산활동을 가로막는 규제 철폐라는 인식도 생산을 중시하는 총산출 개념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케인스의 소비경제를 대변하는 GDP 대신 세이의 생산경제를 지원하는 총산출 개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민경국 < 강원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