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괴물' 된 공무원연금 개혁…관료는 어디 갔나
2006년 여름 어느 일요일, 경제부장을 맡고 있을 때다. 한덕수 당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지원위원장이 예고 없이 한국경제신문 편집국을 찾아왔다. 그는 서류 가방에서 두툼한 자료를 꺼내 놓더니 한·미 FTA의 당위성을 시시콜콜 설명했다. 며칠 전까지 부총리를 지낸 분이다. 홀로 신문사를 찾아다니며 정책을 설명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아내며 FTA의 ‘A to Z’를 차분히 설명하던 그의 모습은 아직도 뇌리에 깊이 남아 있다.

한시(限時) 조직에 수족이 변변했을 리 없다. 지나던 길이라고 했지만 그의 성품을 미뤄 짐작건대 주요 언론을 일일이 찾아 정부 입장을 설명하던 터였을 것이다. 국회도 마찬가지다. 여야를 막론하고 그에게 ‘FTA 강의’를 직접 듣지 않은 의원들은 없다. 모든 이익단체에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긴 주미대사 시절 100명의 상원의원, 435명의 하원의원을 모두 만나 FTA 조기 비준을 촉구했다는 그다.

공무원연금 개혁을 용두사미로 만든 여야 합의가 느닷없이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상향 조정이라는 새로운 논의로 번지면서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다. 여야의 야합(野合)을 지켜보면서 청와대는 부글부글 끓었다고 하는데, 그 많은 관료들은 죄다 어디 가고 청와대만 끓었는지.

무게로 따지자면 한·미 FTA보다 몇 십 배 무거운 사안이다.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50%로 올리면 2083년까지 1669조원이 더 필요하다고 한다. 모두 가입자들이 메워야 하는 돈이다. 포퓰리스트들이 국민의 미래를 제멋대로 농단하는 동안 관료들이 국회의원과 언론, 공무원 노조를 찾아 설득하고, 이해를 구하고, 담판을 지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 안이 느닷없이 나온 것도 아니라고 한다. 야당이 처음 제시한 게 3월 초였다니 말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최종 합의 때 추가된 내용인 것처럼 호들갑이다. 말도 안 되면 실무기구 합의안에 정부가 서명하지 않았으면 될 일이다. 서명은 서명대로 하고 이제 와 월권을 운운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그러고도 누구 하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정치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시민은 정당에 명령하고 정당은 관료를 지휘할 뿐이라고. ‘영혼 없는 관료’라는 얘기가 괜한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정치인들이 주인(국민)과 대리인(관료)의 중개 행위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때 얘기다. 관료가 중개 기능을 포기한 포퓰리스트들의 대리인 역할을 한다면 그건 직무유기다. 바로 대리인의 모럴해저드 문제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금은 어느 관료에게서도 ‘초과위험’을 감수하려는 의지를 찾아볼 수 없다.

관료들은 모든 권력이 국회로 넘어가 속수무책이라고 말한다. 사실 정부 정책에 제동을 거는 데는 여야가 따로 없다. 정부는 국회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법안 하나 제출할 수 없는 형편이다. 장관은 업무도 시작하기 전에 인사청문회에서 만신창이가 된다. 관료들이 주눅들 수밖에 없다.

청와대도 관료를 바보로 만든다. 장관은 국장급에 대한 인사권조차 없다. 그러니 고위직 관료들이라면 청와대에 줄을 대는 게 급선무다. 소신과 소명의식이 자리 잡을 턱이 없다. 정권이 바뀌면 지난 정권의 정책을 단죄하는 풍토도 마찬가지다. 누가 나서겠는가.

세종시의 과장과 사무관들은 1주일에 한두 번 사무실에 들르는 장·차관, 국장들과 토론을 벌인 기억이 가물거린다. 무리한 지시에 반기를 들던 패기도 더 이상 없다. 그저 화려한 페이퍼워크와 달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정책을 주도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관료들이 이렇게 무기력해서는 곤란하다. 소신과 소명의식은 관료가 갖춰야 하는 기본 소양이다. 어렵더라도 공익을 추구하고 헌법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최선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국민의 대리인이자, 관료의 역할이란 말이다.

공무원연금 개혁을 괴물로 둔갑시킨 국회에 한마디 못한 채, 막가자는 공무원 노조에 쓴소리 한 번 못한 채, 이제 와서는 제3자처럼 관전평이나 내고 있는 ‘영혼 없는 관료’들을 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안타깝다.

김정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