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4~30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러시아 마임극 ‘스노우쇼’.
오는 14~30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러시아 마임극 ‘스노우쇼’.
큰 가방을 든 광대가 사랑하는 연인을 뒤로 한 채 기차에 몸을 싣는다. 기적 소리와 함께 광대가 쓴 빅토리아식 모자는 출발을 알리는 연기를 뿜어낸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광대는 편지를 읽다가 굵은 눈물을 떨군다. 그가 찢어버린 편지는 눈송이로 변하고, 거세게 소용돌이치는 눈보라가 되어 객석으로 몰아치기 시작한다.

지난 주말 대구 지산동 수성아트피아 무대에 오른 러시아 마임극 ‘스노우쇼’는 아이뿐 아니라 어른을 위한 동화이기도 했다. 눈은 동심의 세계를 표현하면서도 이별의 슬픔과 고독을 나타내는 이중적인 소재로 쓰인다.

무대는 동심을 생생하게 되살린다. 검은 밤하늘에선 별가루가 쏟아지고, 힘겹게 끌고 나온 침대는 어느새 보트로 변해 바다를 항해한다. 광대의 빗자루에 걸려 나온 거대한 거미줄이 관객석을 뒤덮는 순간 아이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광대들은 관객의 도움을 받아 무대를 탈출하고 객석에서 한바탕 눈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눈보라 속에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아낸 스노우쇼는 러시아 예술가 슬라바 폴루닌(65)의 대표작이다. 1993년 러시아에서 초연된 이후 20여년간 세계 100여개 도시에서 공연됐다. 영국 로렌스올리비에 상과 골든마스크 상 등을 받았고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도 올랐다. 작품을 연출한 폴루닌에게 ‘세계 최고의 광대’, ‘안데르센의 러시아 특사’라는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다.

한국 공연은 2008년 이후 7년 만이다. 대구(4월29일~5월2일)에 이어 5~10일 부산 영화의 전당, 14~30일 서울 LG아트센터로 이어진다. 서울 공연에서 쏟아지는 ‘종이 눈’만 1t 분량이다.

스노우쇼는 폴루닌의 고향인 러시아 작은마을 노보실의 하얀 눈에서 영감을 얻었다. 폴루닌은 “눈이 5m나 쌓여 마을을 뒤덮은 날, 장을 보러 나간 어머니가 돌아오시지 않아 엉엉 운 적이 있었다”며 “그때부터 눈은 내게 죽음과 상실을 연상케 했고, 눈을 싫어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나중에서야 눈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스노우쇼에서 눈에 포근함과 행복뿐 아니라 고독과 슬픔이라는 양면적인 감정이 녹아 있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폴루닌은 스노우쇼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으며 지속적으로 공연되는 이유에 대해 “우정, 고독, 삶과 죽음과 같이 단순하지만 영원히 지속되는 중요한 요소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광대는 우스꽝스럽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현대인의 영혼을 치료하는 의사와도 같습니다. 관객 개개인이 공연을 보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그 속에서 행복과 슬픔, 위로와 감동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대구=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