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6일(현지시간) 미국 보스턴로건국제공항에 도착해 7박8일간의 방미 일정을 시작했다. 일본 현직 총리로는 9년 만의 ‘공식 방문(official visit)’이다.

외교 전문가들은 아베 총리의 방미는 군사적 제약이 없는 이른바 ‘보통 국가’가 되려는 일본의 야심과 중국의 급부상에 대응하기 위한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전략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날 사설에서 “아베 총리가 ‘보통 국가’ 일본에 대한 믿음을 외부 세계에 주려면 입술을 깨물고 예전처럼 과거사에 대해 또 한 번 사과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아베의 방미 성공 여부는 정책협상이 아니라 과거사에 대한 그의 언급에 달려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과거사에 대한 아베 총리의 미국발 첫 발언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방미 이튿날인 27일 하버드대 학생들과 만난 아베 총리는 위안부를 ‘인신매매(human trafficking) 피해자’라고 표현하고 “개인적으로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이는 한 달 전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밝힌 내용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으로 사안의 본질을 교묘히 흐리려는 물타기 의도가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게다가 ‘가슴 아프다’는 표현은 마치 가해자가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고 있어 ‘사과와 반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29일로 예정된 아베 총리의 미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그가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사과를 할 것이란 기대를 접는 게 낫다는 목소리가 지배적이다. 과거 태평양 전쟁의 당사자였던 미국에는 사과하겠지만 한국과 중국 등 일제의 식민 지배와 침략의 대상이었던 주변국에는 고개를 숙이지 않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아베 총리는 27일 오후 워싱턴DC로 이동, 유대인 학살 자료가 있는 홀로코스트박물관과 알링턴국립묘지를 방문했다.

외교 소식통들은 “세계 평화에 공언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지면서 역사수정주의자라는 비판을 희석시키고 평화주의자 이미지를 심으려는 계산된 행보”라고 분석했다. 28일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백악관에서 만찬을 할 계획이다. 아베 총리의 방미 형식은 ‘공식 방문’이지만 내용은 ‘국빈 방문(state visit)’에 준하는 파격적 예우라는 평가다.

워싱턴=장진모 특파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