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법철학자가 말하는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
헌법재판소가 지난 2월 간통죄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간통죄가 국민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사생활 비밀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였다. 이전에는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 인한 피해보다 혼인관계 보호와 사회질서 유지를 중시해 네 차례 합헌 결정을 내렸다. 합헌 결정이 나온 지 7년 만에 헌재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바뀌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계적 법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로널드 드워킨(1931~2013)이 살아 있었다면 이번 결정을 두고 “법체계를 통한 판단보다 법 외적인 변화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지적했을지도 모른다.

[책마을] 법철학자가 말하는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
드워킨은 존 롤스 이후 최고의 법철학자로 평가받는다. 21세기 법철학 분야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학자로 국내에도 그의 저서가 다수 번역돼 있다. 법이나 정책이 외부적 요소에 좌지우지되는 것을 반대한 드워킨은 최근 국내 번역·출간된 《정의론》에서 자신이 평생 탐구했던 법철학과 정치도덕의 토대를 밝힌다.

저자는 도덕적 판단의 독립성, 가치들의 통합성, 해석적 특성이라는 세 가지 가정을 통해 논리를 펼친다. 그는 도덕적 진리란 없고 다양한 입장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라는 회의주의적 관점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는 도덕적 진리란 사회 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사회적 실천 속에서 이뤄지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사람들이 살면서 마주치는 다양한 견해 중에서 어떤 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충돌한다. 저자는 여기서 ‘가치들의 통합성’이란 개념을 제시한다. 자유나 평등 같은 가치들은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석과 상호 연관되는 방식을 통해서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즉, 도덕적 판단에서 ‘진리’란 상호 연관된 가치들이 뒤섞여 경합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법이 규칙의 체계라고 주장하는 법 실증주의를 비판해온 드워킨의 주장을 함축한 것이다.

저자는 “잘 사는 것(living well)이 윤리와 도덕의 기초”라고 말한다. ‘잘 사는 것’은 남들 보기에 좋아 보이는 삶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자기 존중과 진정성이 필요하다고 전제한다. 사람은 자신의 삶을 낭비하지 말고 창조해야 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설명한다. 잘 사는 것이란 공동체적 삶에서 이뤄지는 것이므로 개인이 최선을 다해 살려면 타인이 지닌 도덕이 필요하다. 여기서 드워킨은 “자유와 평등은 대립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저자는 평등과 자유, 법과 민주주의 등 다른 제도와 가치가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한 것이 정의라고 말한다. 개인과 개인의 연대를 넘어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다. 시민들이 자신의 삶을 더 잘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정부가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이라고 말한다. 그는 “정의는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지 않고 확장한다”며 “큰 정부도 작은 정부도 선호하지 않으며 정의로운 정부를 선호한다”고 말한다. 존엄성에 기반한 동등한 존중과 배려야말로 좋은 삶을 더 쉽게 만든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 사상이다.

책을 번역한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철학자 중에 이렇게 자신의 법철학을 현실 문제에 적용해 풀어 보여준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한국에선 진영 논리에 매몰돼 법원 판결을 정치적이라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지만 기본적으로 법체계를 존중해야 한다”며 “변화가 필요하다면 외부적 요소보다 높은 차원의 법체계를 통해 바꾸는 것이 드워킨이 말한 현명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