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들이 일을 많이 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정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도 잘못이다. 시장에서 풀 수 있는 문제는 정부가 들어가면 오히려 그르친다.’ NGO 활동가의 주장이 아니었다. 원조 자유주의자의 직설도 아니다. 오랜 공직 경력의 김인호 무역협회장이 최근 기자들에게 역설했던 말이다. 주옥 같은 발언은 더 이어졌다. ‘무슨 일이든 시장에 맡기고 시장에서 풀리지 않는 극히 일부분에만 정부가 개입하는 게 바람직하다.’ 모두 금과옥조의 지적이었다. 현직들에 대한 강한 비판이기도 했다. 핵심을 짚은 것이어서 한경 사설에서도 다뤄졌다.

반복되는 전직 관료의 정부 비판

이 발언에 한 번 더 주목해보는 것은 30년 경제관료 출신의 반성이랄까, 고언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현직 때는 과연 몰랐을까. 정말로 민간에 나와서야 뒤늦게 깨달은 것일까 하는 게 먼저 드는 의구심이다. 섬긴다는 말까지 나왔지만 한국 관료들의 관존민비, 선관후민의 DNA는 천년 된 문화다. 공직 전체의 풍토다. 파워엘리트 의식에 함몰돼 있다가 퇴직한 뒤에야 이런 진실을 쏟아낸다? 딱히 김 회장을 지칭해 시비하자는 게 아니다. 공직자들의 이런 변신은 꽤 흔하다. 연구원, 경제단체 등을 맡아 자유주의의 전도사가 됐거나 시장경제의 본산에서 맹활동 중인 중진 저명인사들도 비슷한 변신을 했다. 그들 역시 현역 때는 김 회장이 비판한 그런 관치와 정부 주도의 판을 벌이는 데 전문가였다. 그런데 한결같이 퇴직하고서야 입바른 말을 하고 다닌다. 뭔가 구조적인 허점이 있다.

두 번째 의구심은 현직 관료들로 향한다. 선배들의 체험적 호소에 현직들은 귀를 기울일까. 이게 더 중요한 포인트다. 유감스럽지만 현직들은 으레 하는 비판이나 또 하나의 잔소리 정도로 여길 것만 같다. 이런 고언들은 늘 반복됐지만 좀체 안 변하는 게 관료들이다. 이번에도 스스로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심은 합리적인 예측이다.

뒤늦게나마 옳은 얘기인데 김 회장의 언급을 비판할 일은 없다. 하지만 그게 결국은 과도한 규제행정에서 비롯된 패턴화된 언급들이라면, 관료들의 이모작 인생에서 통과의례나 상투적 반성처럼 돼 버렸다면, 달리 볼 대목은 분명히 있다. 논의의 귀착점은 결국 관료들이 무엇으로 버티는가 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고언 외면하면 강압적 개혁뿐

전직 관료들의 공직 비판, 시대가 바뀌어도 난 모르쇠 하는 현직들의 딴청에 숨은 코드를 다시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규제행정, 과도한 재량행정, 사회적 현안이라면 관료들 판단을 거쳐야 하는 행정 절대우위의 문화, 그런 기반의 국가 경영시스템까지 고쳐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것이 행정개혁일 것이다. 관피아나 낙하산 척결 운동도 좋다. 하지만 그런 전관예우 문화는 낙후된 행정의 결과다. 그게 마치 원인인 양 여겨서는 행정이 바뀌지 않는다. 결과와 원인의 혼동은 언제나 본질을 놓치게 한다.

현직들이 OB들의 충정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는 게 첩경의 해법이다. 무수히 실망했지만, “현직 때 잘하라”며 한 번 더 기대를 해볼 수밖에 없다. 별다른 비용 없이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안 되면 현직들을 확 줄여 작은 정부로 가는 수술 외엔 대안도 없다. 고해성사 같은 전직 관료들의 자성도, 교과서 같은 개탄도 이젠 슬슬 물린다. 용기 있는 비판이긴 하지만 솔직히 여운이나 감동은 잘 안 생기기도 하고….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