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프라스 "전쟁 아닌 전투 이겼을 뿐"…'국채만기 폭탄' 째깍째깍
“전투에서 이겼을 뿐 전쟁에선 승리한 게 아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는 21일 자국 TV 연설에서 유럽연합(EU),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 채권단 ‘트로이카’와 합의한 그리스 구제금융 프로그램 연장을 이같이 평가했다. “긴축을 끝내기 위한 중요한 첫걸음을 내디뎠지만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고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앞으로 진행될 그리스와 채권단의 본격적인 구제금융 협상이 험난할 것이라는 내용을 암시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시간 끌기 성공…금융시장 안도

그리스는 20일 채권단과 11시간에 걸친 협상 끝에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4개월 연장하기로 했다. 그리스는 이를 통해 당장 급한 유동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됐다. 또 그리스는 기존 재정긴축 목표를 다소 완화하는 내용을 채권단에서 약속받았다. 치프라스 총리는 협상을 마친 뒤 비상 각료회의를 열고 23일 채권단에 제출할 재정감축과 경제개혁 방안을 논의했다. 채권단 승인이 떨어지면 2400억유로(약 301조원) 규모의 구제금융 가운데 아직 집행되지 않은 72억유로를 받게 된다.

그리스가 제출할 개혁 방안에는 탈세와 부패 척결, 공공행정의 투명화 조치 등이 담길 것으로 예상된다. 채권단은 그리스가 제출한 개혁 방안이 현행 구제금융 조건과 부합한다고 판단하면 오는 4월 말 나머지 지원금을 지급할 방침이다.

올해 세계 경제 ‘태풍의 핵’으로 떠올랐던 그리스 사태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은 안도했다. 20일 미국 뉴욕 증시의 다우지수는 전날보다 0.86% 상승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영국과 독일 증시도 상승 마감했다. 올 들어 폭등했던 그리스 국채 금리도 내림세(국채 가격은 상승세)로 돌아섰다.

국민들 “반쪽 성공” 비판

그리스와 채권단의 협상 타결 소식에도 그리스 경제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그리스가 일시적으로 재정 파탄과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피하게 됐지만 하반기에 대규모 국채 만기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실제 협상 타결 소식이 전해진 20일에도 그리스 은행권에서는 10억유로의 자금이 이탈했다. 가디언은 “4개월간 ‘정지버튼’이 눌러졌지만 그리스 사태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결국 그리스는 부채를 다 갚지 못하고 채권단과 약속한 구제금융 프로그램도 이행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비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그리스 국민과 정치권 강경파의 반발도 넘어야 할 과제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치프라스 정권은 반(反)긴축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워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눈앞에 다가온 국가 부도 사태를 막기 위해 채권단에 일정 부분 양보했다”고 긴축 유지를 기본으로 한 합의 내용을 해석했다. 마켓워치는 “그간 유럽에서 소외됐던 그리스가 이번 협상을 통해 제 목소리를 낸 건 사실이지만 구제금융을 계속 이행해야 하는 데 실망한 국민들이 치프라스 정권에 등을 돌릴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 때문에 그리스가 또 다른 선거를 치르게 되면 그렉시트 우려가 다시 고개를 들 것이라는 설명이다. 지난달 출범한 치프라스 정권은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연장하지 않고 채권단과의 협상에서 부채를 삭감하겠다고 공언해왔다.

김은정 기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