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걱정인형
난 어린 시절의 나를 언제나 그리워한다. 철부지였지만 호기심 많았고, 칭찬에 부끄러워했고, 친구를 그리워했고, 세상을 동경했던 나의 소년 시절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눈시울을 적시게 한 다큐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98세 할아버지와 89세 할머니의 소소한 일상을 담담하게 담았다. 낙엽을 쓸다가, 눈을 치우다가 할머니에게 낙엽과 눈 세례를 퍼붓는 장난꾸러기 할아버지와 이를 즐기는 할머니. 천진난만하다. 따분하게 보일 수 있는 이 영화의 ‘76년간의 사랑과 이별’이 세대를 초월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순수한 사랑에 대한 원초적인 동경이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을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도 많은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아이는 수족관의 스쿠버다이버에게 “아저씨 바다에서 살아요?”라고 묻는다. 아이들만이 생각하고 바라볼 수 있는 말들에 시청자는 미소 지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童話)가 필요한 것일까. 이미 퇴화해 없어져버린 동심을 어른들이 다시 찾고 싶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계산적이지도 가식적이지도 않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세상을 대하는 우리들이 버거워져서가 아닐까 싶다.

우리들은 성공하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같이 달리던 동료가 넘어져도 못 본 척하며 눈을 질끈 감은 채 앞만 보고 뛰었다. 결과의 달콤한 과실을 먹으며 애써 아픈 과정들을 외면했다. 하지만 문득, 갑자기 스스로에게 묻는 시점이 온다. 허전함이 밀려온다. 행복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막상 성공해서 여유로운 생활을 누리고자 하지만 건강을 잃는 것과 같다. ‘짐승은 만족을 알지만 수치를 모르고, 인간은 수치를 알지만 만족을 모른다’는 말처럼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에 우리들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일 수도 있다.

과테말라의 인디언들은 조그만 나무와 헝겊으로 만든 ‘걱정인형’을 아이들의 머리맡에 둔다. 걱정이 많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걱정을 대신 해주는 인형을 선물한다.

잠시 걱정을 내려놓자. 과도한 경쟁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불안함으로 초래되는 걱정을 걱정인형에게 맡기자. 그리고 눈감자.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해 알아야 했던 것을 배웠던 시절로 돌아가자. 친구가 아파 가방을 들어주던 때, 길고양이에게 밥을 먹여주던 때, 엄마에게 삐뚤삐뚤 손 편지를 쓰던 때로. 스파크가 일어나듯 잊고 있었던 숲 속의 상쾌한 공기가 온몸을 휘감는다.

이석현 < 국회 부의장 esh337@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