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反시장정서 조장하는 헌법학 교과서
한국 경제가 저성장의 수렁에 빠져 있다. 경제활동의 발목을 잡는 규제를 풀어 경제를 활성화할 경제적 자유가 절박한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시장에 대한 규제를 한가하게 노래하고 있는 게 있다. 대학의 일부 헌법학 교과서다. 이들 헌법학 교과서는 시장질서의 자생력을 부정하고 정부의 계획과 규제를 신봉하는 르네 데카르트, 토마스 홉스, 존 메이너드 케인스, 존 롤스, 마이클 샌델 등 프랑스 계몽주의 전통의 산물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경제적 자유의 영역을 좁히는 게 우리 헌법이고, 헌법학자들은 직업상 현행 헌법을 충실하게 해석·교육할 수밖에 없기에 교과서가 ‘간섭의 헌법학’일 수밖에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교과서로 교육받은 사람들에게는 기업가 정신, 경제적 자유, 탈(脫)규제의 절박성은 넋두리쯤으로 들릴 것이고 국회의 선량들은 거리낌 없이 반(反)시장적 법률 생산에 주력할 것이다. 경제적 자유를 경시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수그러들지 않고 기업·노동규제 등이 첩첩이 쌓여 온 것도 반시장 정서를 조장하는 헌법학 교과서 때문이라는 비난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흥미로운 건 법치개념에 대한 헌법학자들의 인식이다. 그들의 교과서를 검토하면 그 인식은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게 아니라 권력 나누기의 권력구조를 정하는 게 법치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국가권력의 침해로부터 자유와 재산을 보호할 유서 깊은 정치적 이상이 법치라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둘째, ‘국가 작용이 의회가 정한 법률에 근거하고 그 법률에 따라 행해져야 한다’는 원칙이 법치라는 매우 위험한 인식이다. 입법부가 정한 것이면 그 내용이 무엇이든 모두 법이라고 보면 법치가 아닌 게 없다. 법치란 ‘의회주권론에 기초한 법률 우위가 아니라 헌법 우위를 뜻한다’는 인식이 세 번째다. 헌법 내용이 무엇이든 그에 합당한 입법에 따른 통치가 법치라는 뜻이다. 그러면 규제와 재분배 등 법치가 아닌 게 없다. 시민들의 준법이 법치라는 네 번째 인식은 법치에 대한 말장난의 극치다. 법치를 국민들에게 법을 잘 지키도록 요구하고 기강을 바로잡아 법질서를 세우는 수단으로 여긴다면 전체주의도 법치국가로 오인한다.

안타깝게도 법치개념을 ‘통치행위의 단순한 적법성 조건’과 혼동하는 프랑스 계몽주의의 오류를 범하는 게 헌법교과서라는 걸 직시해야 한다. 그런 혼돈은 자유와 번영을 위한 시장, 법질서, 헌법의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개념적 혼돈을 피할 참뜻을 위해서 ‘법치란 법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관한, 법이 지녀야 할 일반 속성에 관한 원리’라는 하이에크의 탁월한 인식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데이비드 흄, 애덤 스미스, 임마누엘 칸트 등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에 따라 하이에크가 인식론, 시장이론, 윤리학 등 학제융합적 인식에서 도출한 그 일반속성은 간단히 말하면 특혜·차별입법을 금지하는 일반성, 법은 달성하고자 하는 집단목적을 내포해서는 안 된다는 탈 목적성, 특정 행동방식을 당연히 금지하는 내용이어야 한다는 추상성이다.

타인의 인격·신체·재산의 존중, 계약 엄수 등이 정의의 규칙이라는 흄, 스미스 전통의 도덕철학 개념을,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로 취급해야 한다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법학적으로 해석한 게 법치라는 걸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특정 산업·집단의 이익 또는 집단목적을 위해 시장을 통제하는 입법도 법다운 속성의 위반이요, 법치의 침해일 뿐만 아니라 전지전능을 전제하는 치명적 자만이다. 직시할 것은 참된 법과 법치야말로 시장이 저성장, 실업, 빈곤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하는 필수조건이라는 점이다.

경제적 자유의 확대와 규제개혁이 절박한 지금이야말로 인식론, 공공선택, 윤리 등의 학제적 인식을 도외시하는 간섭편향의 헌법학 대신에 시장의 자생력을 신봉하고 참된 법·법치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의 헌법학’을 추구할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민경국 < 강원대 명예교수·경제학 kwumin@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