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거벽등반
깎아지른 암벽에서 잠을 자며 며칠에 걸쳐 오르는 등반을 거벽등반(big-wall climbing)이라고 한다. ‘거대한 벽’이라고 할 만한 대암벽은 1000m급의 미국 요세미티, 안데스의 파타고니아, 노르웨이의 롬스달 등을 가리킨다. 히말라야에도 빙벽 혼합등반을 할 수 있는 거벽이 있다.

가장 험난한 곳으로 요세미티의 화강암벽 엘 캐피탄(914m)이 꼽힌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난코스여서 암벽 등반가들의 성지로 불리는 곳이 수직 암벽 ‘여명의 벽’이다. 이곳을 세계 최초로 맨손 등반한 두 스타 얘기가 온종일 화제다. 1주일 만 오르면 손에 피부가 남아나지 않을 정도라는 곳을 19일 만에 장비 하나 없이 오른 것이다. 그 중 한 명은 9개 손가락만으로 이룬 기적이다. 1970년 고리못을 박고 로프를 사용해 처음 등정했을 때도 28일이나 걸렸다는데, 아무런 도움 없이 19일 만에 올랐다니 더욱 놀랍다.

914m짜리 암벽이라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828m)보다 86m나 높다. 북한산(837m) 정상보다도 높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바위벽을 오르는 과정은 그야말로 매순간 생명을 껴안는 일이다. 등반(登攀)의 ‘반(攀)’이 휘어잡거나 당긴다는 뜻 아닌가.

암벽등반의 역사는 알프스의 몽블랑에서 시작됐다. 초기엔 정상에 오르는 수단에 불과했으나 최근에는 어려운 루트의 등반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도 한다. 암벽등반의 난이도를 평가하는 등급 제도도 있다. 1926년 독일의 벨첸바흐가 로마 숫자를 써서 등급 체계를 만든 게 처음인데, 국제산악연맹(UIAA)은 지금도 로마 숫자를 쓴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요세미티 십진체계(YDS)를 따라 ‘5.15’ 등 아라비아 숫자를 쓴다.

국내에도 암벽등반 명소가 있다. 북한산의 인수봉·백운대·노적봉, 도봉산의 선인봉·주봉·오봉·우이암, 설악산의 울산바위·적벽·장군봉·토왕성 좌우벽, 전북의 대둔산과 전남 월출산 지역의 암장, 춘천 용화산의 암장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엔 인공암벽 등반도 인기다. 김자인 선수 등 스타 출현으로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다. 주요 국제대회로는 4년마다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와 월드컵대회가 있고, 국내에서도 연 20회 가까운 대회가 개최된다.

해마다 사고가 잇따르는데도 암벽을 향한 사람들의 집념은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요세미티 등반팀의 소감이 의미심장하다.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여명의 벽’을 찾는 데 우리가 영감을 줬길 바란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