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윤병락 씨가 서울 관훈동 노화랑의 개인전에 출품한 ‘가을 향기’.
서양화가 윤병락 씨가 서울 관훈동 노화랑의 개인전에 출품한 ‘가을 향기’.
책장 위에 올려진 영롱한 사과, 풋풋한 질감이 살아 숨 쉬는 파란 사과, 신문지에 감싼 먹음직스러운 사과, 궤짝에 담겨 저마다 붉은 얼굴을 내미는 사과….

윤병락 씨 "사진보다 더 정교한 사과로 촉각·후각·미각 다 잡아냈죠"
서울 관훈동 노화랑에서 오는 17일까지 개인전을 여는 극사실주의 화가 윤병락 씨(46·사진)의 사과 작품에는 말랑말랑한 희망이 담겨 있다. 그래서 상큼하고 탐스러운 ‘감성 그림’으로 불린다. 윤씨는 “우리의 삶에 슬픔과 상처가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희망을 간결한 구도로 담아냈다”며 “노래로 치면 조용필의 ‘바운스’ 같은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경북대 미대를 졸업하고 2006년 ‘화단의 스타’로 떠오른 그는 전시회 때마다 컬렉터들이 몰려 작품이 매진되는 몇 안 되는 ‘행복한 작가’다. 일반 그림보다 수십 배 노동집약적인 작업인 데다 현대인들의 모방 본능을 사과에 표현하는 독창성 때문에 국내외 아트페어에 출품하기 무섭게 팔려나갔고, 지금도 컬렉터들의 주문이 쇄도해 내년 말까지 작업이 예약된 상태다.

사진보다 더 정교한 극사실적 기법과 대상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법으로 사과를 그려낸 ‘윤병락표’ 그림이 이처럼 인기를 끄는 이유는 뭘까. 가장 큰 요인은 사과 그림을 통해 시공을 초월한 아름다운 존재에 도달하고 싶은 열망을 감성적으로 터치하는 것이다. 그는 밝은 색감을 뿜어내면서 ‘자연의 본질’을 어루만진다. 사과와 자신, 자연과 관계를 통해 실존적인 존재에 대해 자문자답하는 일종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윤씨는 “사과는 삭막한 현실에 풀이나 강력접착제로 정성껏 붙이고 싶은 꿈속의 벽지 같은 모양”이라며 “그 벽지가 바로 저의 그림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현대인들의 모방 본능을 자극한 것도 인기를 끄는 한 요소로 꼽힌다. 1970년대 말 미국 하이퍼리얼리즘을 흡수해 독창적인 극사실 화법의 경지를 일군 윤씨는 단순히 사물을 모방한 게 아니라 사각 캔버스라는 ‘기호’를 통해 현실을 투영하는 ‘환영의 기술자’를 자처했다. 모방은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한 방편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며 나무판자에 사과를 그대로 재현해 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작업실에서 편하게 있는 것처럼 보여도 작품을 예정된 시간에 완성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채 산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세밀하게, 단계적으로 작업하기 때문에 품과 시간이 많이 든다. 1.6m 크기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린다. 그래도 윤씨는 “사과는 우리를 담는 또 하나의 그릇”이라며 “현실에 부대끼는 사람들에게 촉각, 미각, 후각까지 건네줘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아내고 싶다”고 말했다. ‘불은 희망’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서는 녹슬고 얼룩진 이야기보다는 빨간빛과 파란빛으로 반짝이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사과에 응축해낸 근작 20여점을 만날 수 있다. (02)732-3558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