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네덜란드 등 유럽지역 영화등급분류제도는 등급 판정을 내리기 전 제작자에게 자진 삭제권을 주는 등 한국보다 유연하게 운영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등급 판정을 내리면 불만을 품은 제작자들이 불복해 항의소동을 빚거나, 추후 삭제해 재심의를 받고 있는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데이비드 쿡 영국 영화등급분류위원회(BBCF) 사무총장은 한국영상물등급위원회(영등위) 주최로 2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2014 국제 영화등급 포럼’ 기자간담회에서 “유럽에서는 자발적인 사항과 강제적인 사항 등 두 가지 커트(삭제) 시스템을 운영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쿡 사무총장은 “자발적인 사항이란 위원회가 문제의 장면을 미리 알려줘 제작자들이 스스로 잘라내 등급을 낮추거나, 반대로 장면을 삭제하지 않는 대신 올린 등급을 받도록 선택권을 주는 제도”라며 “이는 절대로 강제적인 조항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강제적인 사항이란 형사법을 저촉하는 장면을 위원회가 직권으로 잘라내는 것이다. 아동을 성적 대상으로 다루거나 동물을 학대하는 내용, 지나친 외설 장면 등이 그것이다.

한국에서는 등급분류 과정에서 제작자에게 선택권을 주는 절차가 없어 불만을 품은 제작자가 공개 항의하거나, 등급분류 판정 후 해당 장면을 뒤늦게 잘라내 재심사를 받는다. 1996년 헌법재판소가 등급분류 심의기관이 영화 내용을 삭제토록 하면 사전검열이라고 결정한 데 따라 영등위가 문제의 장면을 통고하면 불법이 되기 때문이다.

쿡 총장은 또 “영국과 이탈리아 등 4개국은 온라인 영상물에 대해서도 제작자와 시청자들이 함께 참여해 자동적으로 등급을 정하는 ‘유 레이트 잇’ 제도를 시범적으로 도입했다”고 밝혔다. 그는 “뉴미디어의 유해 콘텐츠로부터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라며 “시청자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고 심사기간을 단축시키는 효과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의 등급분류제도가 한국보다 자율적이면서도 소비자에 밀착한 이유는 기구 운영예산을 전액 수수료로 충당하는 데 있다. 영등위는 연간 60억원의 예산 중 정부가 70%,나머지 30%를 수수료로 충당하는 구조다. 영등위는 쿡 총장 등을 연사로 초빙해 유럽지역의 새로운 등급분류 제도를 소개하는 ‘2014 국제 영화등급 포럼’을 27일 부산 그랜드호텔에서 개최한다.

유재혁 대중문화 전문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