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50주년 경제 대도약- 5만달러 시대 열자] 정부 압박에 수수료·금리 내린 은행들 "돈 벌 구멍 막아놓고 기술금융까지 하라니…"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지난 8월 “기술금융을 빨리 정착시키려면 은행에 이를 할당하는 게 필요하다”고 밝혔다. 박근혜 정부의 ‘창조금융’ 활성화 정책의 하나로 추진하는 ‘기술금융’을 조기에 정착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금융당국은 이에 따라 지난달부터 1주일에 한 번씩 은행들의 기술금융 실적을 확인하고 있다.

은행들의 속내는 복잡하다. 기술력 있는 기업을 지원해야 한다는 취지에는 공감한다. 하지만 수익 기반 자체가 쪼그라들고 있어 위험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하는 기술금융에 매달릴 여력이 없다는 하소연이 나온다.

◆과도한 가격 통제로 수익 기반 ‘흔들’

금융사에 대한 정부의 주문은 전방위적이다. 필요에 따라 주문이 바뀌기도 한다. ‘녹색금융’을 하라고 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기술금융’에 사력을 다하라고 한다. 개발경제시대에나 있음직한 ‘1주일 단위 점검’도 마다하지 않는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비단 여신만이 아니다. 필요하면 금리와 수수료 등 가격까지 통제한다. 2011년 말이 대표적이다. 금융사 직원의 고액연봉 논란이 일자 대대적인 수수료 인하 압박에 나섰다. 은행연합회 등 업권별 협회는 곧바로 자동화기기 송금 등 각종 수수료를 최대 50% 일괄적으로 내렸다. 은행들은 한발 더 나갔다. 기준금리 변동과 상관없이 대출 상품에 붙이던 가산금리까지 무조건 인하했다. 수익 악화가 우려됐지만 말도 꺼내지 못했다.
[창간 50주년 경제 대도약- 5만달러 시대 열자] 정부 압박에 수수료·금리 내린 은행들 "돈 벌 구멍 막아놓고 기술금융까지 하라니…"
반대로 금리를 올리라고 한 적도 있다. 금융당국은 지난해 3월 재형저축 출시를 앞두고 은행들에 최소 연 4% 초중반대 금리를 제공하라고 압박했다. 보험사들은 적자에 허덕이면서도 수년간 자동차보험료를 올리지 못했다. 금융당국의 ‘인상 불가’ 방침 때문이었다.

결과는 ‘뻔’했다. 은행 수수료 수익은 2011년 7조8217억원에서 지난해 7조3206억원으로 2년 새 5011억원(6.4%) 줄었다. 같은 기간 은행권 전체 순이익은 10조6826억원에서 4조8546억원으로 반토막 났다. 생명보험사와 손해보험사들의 순이익도 같은 기간 40~50% 감소했다.

정부의 가격 압박은 현재진행형이다. 금융당국은 오는 12월부터 은행에서 돈을 빌린 뒤 3년 내에 갚을 때 물어야 하는 중도 상환 수수료를 대폭 내리도록 했다. 한국의 중도 상환 수수료는 선진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은행들은 냉가슴만 앓고 있다.

◆‘묻지마 지원’ 강요로 부실 급증

금융당국의 ‘팔 비틀기’식 규제는 이중적이다. 기업 구조조정 지원 과정에서 드러나는 이중적 감독 행태가 그렇다. 급할 때 무조건 기업을 지원하라고 해놓고, 나중에 부실이 생기면 혼쭐내는 식이다.

건설사 구조조정 과정에서의 자금 지원 압박이 대표적 사례다. 은행들은 지난해 초 금융당국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쌍용건설에 대한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갔다. 워크아웃을 전후해 채권단이 투입한 금액은 7000억원에 이른다. 그러나 작년 말 쌍용건설이 결국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채권은 대부분 휴지 조각이 됐다.

산업은행은 STX그룹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부의 압박 탓에 총대를 멨다가 작년에만 1조4000억원가량의 손실을 냈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은행의 주요 수익기반인 금리와 수수료를 통제해 놓은 채, 걸핏하면 필요한 산업이나 기업에 대출해주라는 분위기에서 수익성을 추구하기는 여간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금융산업 육성으로 GDP 6만달러 시대 연 호주

전문가들은 금융이 경제 혈맥으로서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기업과 가계 지원을 위한 ‘수단’이 아닌 자체적 ‘산업’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주재성 우리금융경영연구소 대표는 “공적 기능을 무리하게 강조하면 가계 및 기업 부실에 따른 손실을 흡수할 능력이 약해지는 등 ‘선순환 구조’가 깨질 우려가 있다”며 “금융을 단순한 자금 공급이나 지원 수단이 아닌 산업으로 보고 육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금융을 산업으로 보고 육성한 대표적 해외 사례로는 호주를 들 수 있다. 1990년대 저성장 국면에서 정부 차원의 금융산업 육성 정책을 통해 1인당 국내총생산(GDP) 6만달러 시대를 연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정부의 적극적 지원 아래 대표 은행인 ‘ANZ’는 2004년 뉴질랜드 국립은행을 인수하고 2009년에는 스코틀랜드 왕립은행(RBS)의 아시아 자산을 인수해 세계적 은행으로 거듭났다.

서병호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은행들은 경기 부진으로 부실 자산이 늘고 건전성 비율 달성 압박이 심해지면 경기 민감 업종과 중소기업 대출을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며 “대출 가산금리나 수수료 등을 자율적으로 책정할 수 있도록 해 위험에 따르는 적정 이윤을 보장해줘야 한다”고 했다.

장창민 기자 cm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