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구기자 eg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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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태권도 재미없어요. 제가 했던 운동이 아니에요. 발로 깔짝깔짝 그게 뭡니까.”

<서>양에서 온 <태>권도 사<부>, 서태부(스티븐 캐프너) 서울여대 영문과 교수의 말이다. 태권도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고향을 등지고 한국에 정착한 그이기에, 태권도 찬양이 줄줄 나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로 비판이 이어졌다. “태권도 원류는 사실 공수도(가라테)입니다. 한국이 종주국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없어요.” 그는 엄격한 ‘지(智)·덕(德)·체(體)’ 일체론자다. 운동뿐 아니라 지식과 교양을 쌓는 것을 무척 중요시한다. 잠시 몸 담았던 모 대학 제자들을 가리켜 “공부 정말 안 하려고 한다. 무식이 자랑인 줄 안다”고 거침없이 평가했다. ‘언어의 마술사’ 소설가 이효석의 문학을 좋아하는 번역가이기도 하다. 24시간 잠들지 않는 나라, 한국이 “참 좋다”는 서 교수를 서울여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몬태나주의 ‘태권 청년’

서 교수는 미국 서부 몬태나주 미줄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해 야구 농구 미식축구 등 안 해 본 운동이 없다. “미국은 학교 차원이 아니라 주 정부, 카운티, 시 차원에서 운동을 생활화하도록 지원해요. 어딜 가도 리그에 가입할 수 있고….” 그가 나온 고교 이름은 ‘헬게이트’, 우리말로 지옥문이다. 몬태나주는 서부 개척지여서 협곡(캐니언)이 많다. 정복자들이 들어올 때 인디언들이 협곡 양쪽에서 활 세례를 퍼부어 지옥을 맛보게 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그는 1975년 1월 헬게이트고 1학년 때 태권도를 처음 알았다. “그때 이소룡이 유행이었어요. 요샛말로 미드(미국 드라마)인 ‘쿵푸’도 인기를 끌었고요. 누구나 한번쯤 도장에 다녀볼 정도로 인기가 굉장했어요. 중국 일본 한국 무술 다 들여다봤죠. 그런데 발차기는 태권도가 가장 멋있는 거예요. 한 번 해보니까 ‘아, 이거 평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대학원생이던 미국 태권도 개척자 민경호(켄 민) UC버클리 교수가 몬태나주에서도 고교생들이 태권도를 익힐 수 있게 역할을 했다. 가끔 민 교수에게 단체 지도를 받았다는 서 교수는 민 교수를 ‘사부님’이라고 불렀다.

[人사이드 人터뷰] 태권도 발차기에 반해 40년…"요새는 깔짝깔짝, 그게 뭡니까"
몬태나주립대에서 스포츠과학을 전공하면서 태권도 선수 생활을 했다. 1987년에는 북중남미 국가 40여개국이 참가하는 ‘팬아메리칸 게임’에 미국 대표로 나가 금메달을 땄다. 이듬해 서울올림픽에서 태권도가 시범종목으로 채택된다는 소식에 1988년 1월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한국체육대학에서 맹훈련하던 중, 불의의 무릎 부상으로 출전의 꿈을 접어야 했다. 당시 국기원과 세계태권도연맹 관계자들이 벽안의 ‘태권 청년’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올림픽이 끝나고 연맹 학술대회 준비 같은 걸 도왔어요. 무릎 부상이 생각보다 심해서 고민이었는데 연맹 쪽 분들이 함께 태권도를 세계에 널리 알리자고 했습니다.” 대학 마지막 남은 한 학기를 마치고 1989년 여름 한국에 들어온 뒤, 지금까지 쭉 살고 있다. 그의 태권도 단수는 지난 6월에 딴 공인 8단. 얼마 전 미국에 갔을 때 펍이 밤 12시께 문을 닫으려 하자 당황스러워서 적응이 안 됐다는 그는 이제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같이 변했다.

미국 술집 문화가 낯설어졌다

그는 치과의사인 아버지, 무용가인 어머니 밑에서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평범한 직장에서 일하길 바랐던 부친은 그가 대학생 때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돌아가시기 한 달쯤 전에 제가 경기하는 것을 처음 보셨어요. 그때 ‘왜 태권도를 택했는지 알겠다. 멋지다. 잘 자라줬다’고 격려하시던 게 생각납니다.” 1959년생인 그는 아직 미혼이다. 독신주의자도 아니고 오래 한국에서 생활한 그에게 로맨스가 없었을 리 없다. 가장 길게 연애한 건 5년. “좋은 한국 여자분을 만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뤄지지가 않았네요. 개인적으로 결혼이란 제도가 별로…. 그냥 자연스럽게 사는 게 … 제 욕심인가요. 이제 해야겠죠. 잘 될지 모르겠지만(웃음).”

그의 논문들 주변에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서울대 체육교육학과에서 ‘태권도 철학의 본질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동양 무도 수련관의 변천과 현대적 의미’로 박사학위를 땄다. 석사학위 논문에서는 태권도의 기원을 추적하면서 ‘태권도는 사실 한국 고유의 무도가 아니며 원류는 가라테’라는 주장을 폈다. 사방에서 ‘그런 논문 쓰지 마라’는 압박이 들어왔지만 지도교수(정응근 전 서울대 교수)가 지원해준 덕에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박사학위 논문 일부는 ‘문대성 박사 논문 표절 사건’에 관련돼 있다. “제 논문 내용이 출처 없이 인용돼 있어요. (문대성 IOC 위원은) 한참 후배예요. 같이 겨루기도 많이 했죠. 마지막으로 만난 게 꽤 됐는데 언제더라. 다시 만나면 따져봐야겠네요. 아마 내 앞에 못 나타날 걸요(웃음).”

이효석 문학에 푹 빠지다

태권도만큼이나 그를 사로잡은 것은 한국 근현대 소설이다. 그는 ‘이효석 장편소설 벽공무한의 영역 및 작품 연구’로 연세대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상 ‘실화’, 이효석 ‘개살구’, 양귀자 ‘늪’ 등 다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해 펴냈다. “이효석 하면 사람들이 메밀꽃 필 무렵만 떠올리는데 참 안타까워요. 그건 ‘원 오브 뎀(one of them)’일 뿐인데요. 이효석 작품에서 구사하는 언어는 실로 예술입니다.”

그가 말한 기막힌 작품 중 하나, ‘분녀’에서는 한 여인이 마을 다섯 남자에게 연달아 겁탈당하는 내용이 은근하게 펼쳐진다. “표현이 구수하고 아름다워요. 여주인공은 나중에 오히려 즐기게 돼요. ‘당초에 몸을 뜯고 울고 하였으나 지금 와 보면 명준이나 천수나 만갑이 다 같다. 기운도 욕심도 감동도 사내란 사내는 다 일반이다. 마치 코가 하나요 팔이 둘인 것 같이 뛰어나지 못한 사내도 나은 사내도 없고 몸을 가지고만 아는 한정에서는 그 누구가 굳이 싫은 것도 무서운 것도 없다. 명준에 준 몸을 만갑에게 못 줄 것 없고 만갑에게 허락한 것을 천수에게 거절할 것이 없다. (중략) 생각다 못해 분녀는 밤늦게 거리로 나갔다. 만갑이밖엔 생각나는 것이 없다. (중략) 생각하기도 부끄러운 일이나 사실 왕가는 특별한 인간이었다. 사내 이상의 것이라고 할까.’ 어때요. 이런 거 번역 고민할 때 정말 짜릿해요.”

태권도 정진하면 마음이 맑아져

서 교수는 혈혈단신으로 한국에 건너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각종 배달,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했다. 그렇게 치열하게 벌고 더 치열하게 운동했다. “태권도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인내, 끈기입니다. 내 자신을 이기고 또 이기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마음이 굉장히 편안해져요.” 그런데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태권도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태권도 관련 단체가 유독 문제가 많아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승부 조작하기 좋은 종목이라서 그런가. 대한체육인협회 어떤 분이 ‘올림픽 정식종목 28개 관련 단체 중 태권도가 가장 심하다’고 대놓고 얘길 합니다. 제가 1988년 들어와 1000개 가까운 시합을 다 챙겨 봤는데, 마지막에 물병 날아다니고 욕 난무하고 아수라장이 안 된 시합이 없었어요. 협회 비리도 끝없어요. 파벌도 많고. 완전 불치병, 나아지지가 않네요. 좀 교양을 가지고 합리적으로 행동했으면 좋겠습니다.”
[人사이드 人터뷰] 태권도 발차기에 반해 40년…"요새는 깔짝깔짝, 그게 뭡니까"
'전자호구제' 도입 후 화려한 발차기 실종

박력 없어진 태권도 왜
센서로 타격 감지…"점수따기용 발차기만"
경고는 주심이…승부조작 논란 부르기도


서태부 교수가 “태권도가 박력이 없어졌다”고 한 것은 전자호구제 때문이다. 전자호구제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판정을 막기 위해 올림픽 태권도 주관단체인 세계태권도연맹이 도입한 것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부터 적용됐다. 발 쪽의 센서와 보호구에 부착된 센서가 상호작용해 타격을 감지하고 1점, 2점 식으로 점수를 매긴다. 판정 시비를 막기 위한 고육책이지만 화려한 발차기가 사라지고, 점수 내기용 발차기만 남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게임에는 주심 한 명, 부심 세 명, 배심 두 명으로 총 여섯 명의 심판이 관여한다. 전자적으로 점수를 매길 수 없는 얼굴 타격과 주먹 공격은 부심이 점수를 매긴다. 경고를 주는 것은 주심만 가능하다. 경찰이 최근 발표한 ‘서울시태권도협회 승부조작 사건’에서는 주심이 50초 동안 무려 일곱 번의 경고를 남발해 승패를 바꿔 버렸다. 피해 선수의 상대 선수 아버지인 모 대학 태권도학과 교수 A씨→모 중학교 태권도 감독 B씨→서울시태권도협회 전무 C씨→협회 기술심의회 의장 D씨→협회 심판위원장 E씨→협회 심판부위원장 F씨→심판 G씨로 점조직형 청탁이 이뤄졌다.

태권도 단수는 1~9단으로 이뤄져 있다. 6단 이상부터는 주로 품새를 본다. 명예직인 ‘10단’도 있다. 김운용 전 IOC 위원, 후안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등이 10단이다. 서 교수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도 줘서 태권도인들이 부적절하다며 항의한 적이 있다”며 웃었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