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은폐문화가 키워 온 병영 폭력
우리 군의 병사들 대부분은 후임병 시절 크고 작게 인권을 유린당한다. 누구나 다 당하는 일이라 별 죄의식이 없고 계급이 오르면서 피해자는 가해자로 변한다. 험한 후임병 시절을 겪어낸 선임병은 새로운 후임병의 인권을 유린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그리고 상사에게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군대문화는 이 특권을 묵인한다.

민간부문의 인권은 옛날보다 엄청나게 신장됐는데도 유독 군대문화만이 시대 흐름을 역행해 왔다. 병영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피해 병사의 고발이 있어야 하지만 절대복종의 군대 문화가 걸림돌이다. 피해를 당했더라도 상사를 고발하는 하급자는 지휘관을 불편하게 하고 피해자도 이 사실을 잘 안다. 사태가 상사 고발보다는 자칫 총기난사의 임 병장 사건으로 비뚤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윤 일병 사건이나 임 병장 사건이나 일이 터지고 나면 첫 수습조치는 축소은폐다. 그리고 결국 사건이 드러나면 무조건 지휘관 옷부터 벗긴다. 그런데 이런 처벌 관행은 은폐를 오히려 조장하고 군대문화의 문명화를 가로막으며 후임병들을 인권 사각지대에 내몬다.

전투에 임하는 장병의 자세는 필승의지라야 한다. 그러나 전투는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소위 ‘승패는 병가(兵家)의 일상사’다. 전투가 끝나면 잘잘못을 분석하고 상벌을 분명히 해야 그 다음 전투에서 더 좋은 성과를 거둔다. 패전했다고 해서 해당 지휘관을 무조건 처벌하는 것은 결코 능사가 아니다.

병영 폭력도 마찬가지다. 시비곡직을 가린 결과 지휘관이 할 도리를 다 했다면 지휘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 군대는 그 경우에도 하급자의 정신교육에 실패한 책임을 지휘관에게 묻는다. 이와 같은 논리라면 일반 형사사건에서도 범인은 물론 범인의 부모, 그리고 학창 시절의 교사까지 처벌 대상에 포함해야 할 것이다.

엄중한 지휘관 문책이 부당하게 획일적이면 그 결과는 사태의 은폐 축소라고 하는 엉뚱한 부작용으로 이어진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주변 부대들도 암암리에 은폐에 동조한다. 모르기는 해도 참모총장을 비롯한 우리 군의 모든 간부들도 몇 차례 직간접적 은폐에 성공했기에 오늘의 지위에 올랐을 수도 있다.

병영 폭력이 번번이 해당 지휘관의 은폐 축소로 가려지면 선임병의 행동은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일탈한다. 폭행이 있어도 지휘관이 적극 통제하지 않으므로 그 내용도 드러내 놓고 악랄해진다. 알고 보면 역시 평범한 사람인 가해 선임병이 점차 믿을 수 없는 악마로 변신해 간다.

이 적폐를 푸는 첫 단추는 은폐 문화 척결이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병영폭력 예방 수칙을 제대로 제정하는 일이다. 이 수칙대로 지휘해온 지휘관에게 책임을 추궁하지 않는다면 사고의 축소 은폐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흠결이 전무한 지휘 경력은 불가능한데 그동안 우리 군은 그것을 강요해 왔다. 이제 솔직하게 무사고의 지휘 경력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고가 발생하면 투명하게 책임소재를 밝히는 관행을 도입해야 한다.

지금 영화 ‘명량’으로 새삼 사람들이 우러르는 이순신 장군은 이 영화가 없더라도 민족사에 길이 남을 수호신이다. 그런데 이 충무공도 녹둔도 패전의 책임을 추궁당해 참수당할 뻔했다. 마침 장군이 당시 요새의 구조적 약점과 병력 부족 사항을 보고하고 상부에 보완 조치를 요구한 공문이 있었기에 백의종군으로 감형받고 뒷날 수군통제사로 재기할 수 있었다.

유능한 지휘관도 피하지 못하고 사고를 당할 때가 있다. 이 경우 사고 발생의 전말을 면밀히 조사해 규정을 어긴 사람들만 추려서 처벌하는 것이 옳은 일처리다. 단순히 지휘관이라는 이유로 규정대로 업무를 수행했음에도 지휘책임을 엄중하게 묻는다면 누구라도 사고를 은폐하려고 나서기 마련이다.

병영 폭력을 막지 못했다고 지휘관을 무조건 면직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다. 엄정한 군기는 획일적 처벌이 아닌 신상필벌에서 나온다.

이승훈 < 서울대 경제학 명예교수 shoonlee@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