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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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를 더 낮추고 상대방의 눈을 보고!”

경기 의정부 신곡1동에 있는 의정부초교 체육관. 농구공을 든 아이들 사이로 2m가 넘는 ‘거인’이 보인다. 키가 자신의 허리춤밖에 안 되는 아이들과 함께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남자. 뒤로 넘겨 길게 기른 머리와 콧수염 때문에 외모가 조금 달라졌지만 왕년의 농구스타 한기범(50)이라는 걸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본인의 이름을 따 ‘한기범 희망나눔’이라는 재단을 설립한 그는 저소득층,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대상으로 농구를 가르치는 말 그대로 ‘키다리 아저씨’로 살아가고 있다.

한기범은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기아자동차에서 뛰며 국가대표 센터로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다. 그는 허재, 강동희 등과 함께 농구대잔치에서 일곱 차례나 정상에 올랐다. 207㎝ 장신을 앞세운 호쾌한 덩크슛은 당시 청소년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대단한 선수였다는 걸 알고 있을까.

“아저씨는 뭘 먹고 키가 컸는지 궁금해요. 농구공이 작아 보여요. 우지원, 서장훈은 아는데….”

아이들은 그런 건 관심 없다는 듯 까르르 웃으며 흩어진다. 한기범은 “아이들이 대부분 사랑과 관심을 제대로 못 받고 자라 수줍음이 많다”며 “농구를 가르치면서 오히려 내가 더 많이 배운다”고 말했다. 농구밖에 몰랐던 한기범이 희망전도사로 변신한 까닭은 무엇일까.

“너무 무서워 화장실에서 울었다”

한기범은 1996년 은퇴 후 잠시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중앙대 코치 시절 김태환 감독을 보좌하며 중앙대를 대학 최강팀으로 이끌기도 했다. 하지만 유순한 성격 탓에 감독은 맞지 않겠다고 생각해 사업가로 진로를 바꿨다. 출발은 성공적이었다.

“그땐 키 크기 열풍이 불었어요. 홈쇼핑에서 건강식품을 팔았는데 정말 잘팔렸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돈이 안 들어오더라고요. 계약 내용을 잘 살펴봐야 했는데 사업을 잘 모르다 보니 실패했습니다.”

사업이 실패하자 죽음의 위기가 찾아왔다. 한기범은 우성으로 유전되는 선천성 질환의 일종인 마르판증후군으로 2000년과 2008년 두 차례 심장수술을 받았다. 그는 같은 질환으로 아버지와 남동생을 잃었다.

“키는 갑자기 자라는데, 내장기관이 그걸 못 따라가는 거예요. 대동맥 부분이 풍선처럼 늘어나는데, 그러다 죽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농구나 배구 선수들이 이런 증상이 많대요. 동생도 회사에서 일하다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더니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신기하다고 하더군요. 너무 무서워 혼자 화장실에서 문을 잠그고 울었어요.”

한기범은 뭐든지 혼자 해결하려는 버릇 때문에 더 힘들었다고 했다.

“운동선수 시절에는 슛이 안 들어가면 피나게 연습하면 됐어요. 그런데 사회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사업에 실패하고 몸이 아플 때 아내와 주변사람들에게 알렸어야 했는데, 혼자 끙끙 앓다 보니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운동선수나 연예인들은 사회생활을 잘 모르다 보니 혼자 고민하다 자살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후배들에게도 단단히 준비하고 사회로 나가야 한다고 말해요.”

그는 수술을 집도한 송명근 건국대 교수를 생명의 은인으로 꼽았다. 두 번째 수술을 받을 때는 사업 실패로 집이 넘어가 수술비조차 없었다. 한기범은 “심장재단에 가서 부탁을 했는데, 어느 단체와 연결이 돼 수술을 받게 됐다”며 “무사히 수술을 마친 뒤 이 빚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농구로 학교폭력 막을 수 있어”

한기범은 수술을 받은 이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하지만 평생 농구만 해 온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우연히 안병용 의정부 시장님을 알게 됐어요. 알고 보니 대학 선배님이시더라고요. 시장님께서 ‘홍명보 자선 축구경기를 하는데, 농구는 못 하느냐’고 하시더라고요. 농구라고 못할 것 없겠다는 생각에 기획을 하게 됐어요. 초창기 때는 시장님이 후원을 받을 수 있게 지역기업도 소개해 주고 많은 도움을 받았죠.”

지난 5월에는 ‘희망농구 올스타전’을 개최했다. 김주성, 양동근, 함지훈, 윤호영 등 한국 농구를 대표하는 스타들이 총출동했다. 수익금 전액은 어린이 심장병 환자의 수술비를 위해 쓰였다. 6월부터는 국민생활체육회와 함께하는 ‘한기범 희망 농구교실’을 열고 서울 강동구 강일중, 강서구 방화중, 동작구 영등포중, 서대문구 홍은중, 경기 의정부 발곡중, 의정부초교에서 100여명의 아이들에게 농구를 가르치고 있다. 지난달에는 강원 철원군 병영체험 수련원으로 2박3일간 여름농구캠프를 다녀왔다.

한기범은 농구의 교육 효과가 크다고 강조했다.

“축구는 여러 사람이 필요하고 야구는 장비가 필요하잖아요. 농구는 넓은 장소가 필요 없어요. 농구대와 공 하나만 있으면 쉽게 할 수 있죠. 농구는 기본적으로 팀워크가 중요하다 보니 피부를 맞대면서 자연스럽게 단합, 신뢰를 배울 수 있습니다. 농구를 가르치면 학교 폭력, 왕따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가르치는 아이들도 농구를 배우고 많이 밝아진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미군도 장병들의 폭력성을 줄이기 위해 여가시간에 농구를 많이 하도록 유도하죠.”

그가 선수로 활약하던 때보다 농구 인기가 시들해진 것은 안타깝다고 했다. 한기범은 “용병 선수가 들어오면서 전술이 과거보다 오히려 단순해졌다”며 “스타선수가 나오고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야 다시 농구붐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오지에서 농구 가르치는 것이 꿈

[人사이드 人터뷰] 한기범, 불우아동에 꿈 심어주는 키다리 아저씨의 '희망 덩크'
좋은 뜻에서 자선사업을 하고 있지만 재단은 재정적으로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다. 서울 중구 장충동의 사무실은 그가 제대로 허리를 펴지 못할 만큼 작다.

“키다리 쇼핑몰이라고 스포츠 용품을 판매해요. 자생을 위한 사업이죠. 또 매달 정기적으로 후원해주는 분들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힘들어요. 행사를 할 때마다 대기업, 은행에 가서 후원을 요청하는데 후원금 모으는 게 가장 어렵죠. 요즘엔 경기가 안 좋아서 그런지 후원받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농구교실을 더 확장하려면 경제적으로 안정돼야 하는데 고민이 많습니다.”

한기범은 더 많은 사람들이 재능나눔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그는 “스스로 잘 몰라서 그렇지 누구나 특별한 능력이 있다”며 “돈이든 예술이든 재능을 나누는 풍토가 사회 전반에 조성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기범의 최종 목표는 해외에서 봉사활동을 펼치는 것이다.

“아이들이 밝게 웃는 걸 보면 좋아요. 일을 할수록 기쁨을 느끼게 돼요. 예전에 ‘도전 지구탐험대’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인도네시아, 필리핀, 아프리카 등 오지를 많이 다녀왔어요. 그런 곳에서도 농구를 가르치고 싶어요. 우리가 선진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듯 다른 나라에도 나눔을 베푸는 것. 그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다시 아이들에게 농구를 가르치기 위해 나서는 키다리 아저씨의 뒷모습은 더욱 커보였다.

■ 응답하라, 1994 농구팬

한기범과 ‘허동택 트리오’를 아시나요
기아차팀서 5개시즌 연속 우승 이끌어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중심은 농구 이야기다. 1990년대 초반 한국은 농구 열풍으로 뜨거웠다. 만화 ‘슬램덩크’와 드라마 ‘마지막 승부’는 청소년들을 농구 코트로 이끌었다. 교복의 완성은 농구화였고 골대 1개에서 5~6개 팀이 동시에 농구를 즐기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었다.

당시 한국의 농구리그 ‘농구대잔치’는 한기범과 허재-강동희-김유택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허동택 트리오’가 지배했다. 이들 네 명은 모두 중앙대와 기아자동차를 거치면서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우승컵을 휩쓸었다. 기아자동차는 1988~1989년부터 1992~1993년까지 5개 시즌 연속 정상에 올랐다. 1993~1994년 서장훈이 버틴 연세대에 우승을 내주기도 했지만 1994~1995년, 1995~1996년 다시 연속해서 우승컵을 안았다.

화려한 개인기를 보이며 ‘농구 대통령’으로 불리던 허재와 넓은 시야로 코트를 지휘하던 강동희가 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한기범과 김유택의 골밑 활약도 돋보였다. 키 207㎝ 장신 센터였던 한기범은 국내 선수 가운데 몇 안 되는 ‘덩커’로 이름을 떨쳤다. 한기범은 1989~1990년 대회 MVP에 올랐다.

한기범은 “중앙대에서 센터로 뛸 때 좋은 라이벌이었던 (김)유택이는 빠르고 전투적이었다”며 “승부욕이 강해 지기라도 한다면 씩씩거리며 화를 낼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이어 “허재는 워낙 운동신경이 좋아 술 마신 다음날도 엄청난 경기력을 보이곤 했다”며 “솔직히 운동선수로서 부러웠다”고 말했다.

한기범과 허동택 트리오는 은퇴 후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있다. 허재는 2005년부터 프로농구 전주 KCC 이지스 감독으로 팀을 이끌고 있으며 김유택은 2011년부터 모교 중앙대에서 감독을 맡고 있다. 강동희는 프로농구 동부 프로미 감독을 맡았지만 지난해 3월 승부조작 사건에 연루돼 한국프로농구연맹(KBL)에서 제명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최만수 기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