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원자력 연구개발의 자율성 확보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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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사전동의 필수인 핵연료 연구
연구현장의 자율성 훼손 심각해
사후통보 형식 등 개선 필요 절실"
양명승 < 前한국원자력연구원장 >
연구현장의 자율성 훼손 심각해
사후통보 형식 등 개선 필요 절실"
양명승 < 前한국원자력연구원장 >
얼마 전 원자력 관련 학회 세미나장에서 한 선배 과학자를 만났다. 현역 시절 사용후핵연료 기초연구를 이끌던 거물급 연구자였다. 은퇴 후에도 종종 학회장을 찾아 후배들의 연구동향에 관심을 기울이는 열정을 보이고 있다. 그날도 한·미 원자력협력협정 개정 협상을 통해 원자력 연구개발을 가로막고 있는 손톱 밑 가시를 반드시 뽑아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원로 원자력 과학자가 말한 손톱 밑 가시란 과연 무엇인가.
원자력 지식과 기술을 독점하고 있던 미국은 1953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선언’ 이후 핵물질, 장비, 관련기술 등을 다른 국가에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를 받기를 희망하는 국가는 미국과 원자력협력협정을 체결해야 했다. 한국 역시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1950년대 중반 미국의 지원을 받아 원자력 분야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60여년간 세계 어느 국가와도 비교할 수 없는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단기간 내 원자력 기술 자립을 이뤘고 아랍에미리트(UAE)에 한국형 원전 4기, 요르단에 연구용 원자로를 수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제는 세계 5위의 원자력 발전국(發電國)으로 바뀌었다.
미국이 다른 나라와 체결하는 원자력협력협정은 ‘사전동의권’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미국이 제공한 물질이나 장비를 특정 목적에 사용할 경우, 공급국(미국)의 동의를 사전에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예컨대 미국산 우라늄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의 형상이나 내용을 변경하거나 재처리, 재활용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동의가 필요하다.
원자력 분야 핵심적 기초 연구 중에는 ‘조사후시험(照射後試驗)’이란 활동이 있다. 새로운 핵연료의 개발이나 핵연료의 거동 특성을 확인하기 위한 사용후핵연료 이용 연구 활동을 통칭하는 의미다. 연구를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사용후핵연료의 형상 또는 내용을 변경해야 하는데 미국산 핵물질을 사용할 경우, 미국의 동의가 필요하다. 한국은 1980년대부터 이제까지 조사후시험에 대해 건별로 연구내용과 범위를 미국 측에 미리 설명하고 사전동의를 받고 있다.
이런 절차를 거치다보니 원자력 연구개발은 자유로울 수 없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도전적인 연구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조사후시험과 같은 기초적인 연구개발 활동도 사실상 자율적인 추진이 불가능했다. 동의를 받기 위해 불필요한 행정력 낭비도 많았다. 피땀어린 노력을 통해 원자력 기술 자립에 성공했지만 우리 땅에서조차 기초적인 연구활동을 맘껏 펼쳐볼 수 없었던 과학자들의 어려움과 서러움이야 오죽했겠는가. ‘건별 사전동의’ 체계는 1990년대부터 향후 5년간의 활동을 한꺼번에 동의받는 방식으로 일부 개선되기는 했다. 하지만 모든 연구내용을 미리 상세히 제출해야 하고, 이를 갱신하기 위한 절차에 1년 이상 소요된다. 연구 일정에 차질을 겪는 등 자율적인 활동을 수행해 나가기에는 아직도 부족함이 많다.
이 같은 후진적 협력체계는 세계 원자력 선진국으로 도약한 한국에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 미국이 상호 신뢰의 바탕 아래 이미 다른 선진국들에 적용하고 있는 선진적 협력체계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연구의 세부적인 내용까지 미리 알리고 동의받는 방식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연구 활동을 먼저 수행하고 나중에 알려주는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협상에서 언론과 여론의 관심은 온통 농축과 재처리에만 쏠려 있다. 실제 국가적으로 추진할 계획도 없는 추상적 개념에 매몰된 게 문제다. 실질적으로 과학자들의 현장 연구활동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게 무엇보다 시급하다. 자율적 원자력 연구개발 여건의 확보가 관념적 또는 명목상의 이슈보다 훨씬 중요하다. 원로 과학자의 당부에 귀를 기울일 때다.
양명승 < 前한국원자력연구원장 >
원자력 지식과 기술을 독점하고 있던 미국은 1953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선언’ 이후 핵물질, 장비, 관련기술 등을 다른 국가에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를 받기를 희망하는 국가는 미국과 원자력협력협정을 체결해야 했다. 한국 역시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1950년대 중반 미국의 지원을 받아 원자력 분야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60여년간 세계 어느 국가와도 비교할 수 없는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단기간 내 원자력 기술 자립을 이뤘고 아랍에미리트(UAE)에 한국형 원전 4기, 요르단에 연구용 원자로를 수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제는 세계 5위의 원자력 발전국(發電國)으로 바뀌었다.
미국이 다른 나라와 체결하는 원자력협력협정은 ‘사전동의권’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미국이 제공한 물질이나 장비를 특정 목적에 사용할 경우, 공급국(미국)의 동의를 사전에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예컨대 미국산 우라늄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의 형상이나 내용을 변경하거나 재처리, 재활용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동의가 필요하다.
원자력 분야 핵심적 기초 연구 중에는 ‘조사후시험(照射後試驗)’이란 활동이 있다. 새로운 핵연료의 개발이나 핵연료의 거동 특성을 확인하기 위한 사용후핵연료 이용 연구 활동을 통칭하는 의미다. 연구를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사용후핵연료의 형상 또는 내용을 변경해야 하는데 미국산 핵물질을 사용할 경우, 미국의 동의가 필요하다. 한국은 1980년대부터 이제까지 조사후시험에 대해 건별로 연구내용과 범위를 미국 측에 미리 설명하고 사전동의를 받고 있다.
이런 절차를 거치다보니 원자력 연구개발은 자유로울 수 없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도전적인 연구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조사후시험과 같은 기초적인 연구개발 활동도 사실상 자율적인 추진이 불가능했다. 동의를 받기 위해 불필요한 행정력 낭비도 많았다. 피땀어린 노력을 통해 원자력 기술 자립에 성공했지만 우리 땅에서조차 기초적인 연구활동을 맘껏 펼쳐볼 수 없었던 과학자들의 어려움과 서러움이야 오죽했겠는가. ‘건별 사전동의’ 체계는 1990년대부터 향후 5년간의 활동을 한꺼번에 동의받는 방식으로 일부 개선되기는 했다. 하지만 모든 연구내용을 미리 상세히 제출해야 하고, 이를 갱신하기 위한 절차에 1년 이상 소요된다. 연구 일정에 차질을 겪는 등 자율적인 활동을 수행해 나가기에는 아직도 부족함이 많다.
이 같은 후진적 협력체계는 세계 원자력 선진국으로 도약한 한국에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 미국이 상호 신뢰의 바탕 아래 이미 다른 선진국들에 적용하고 있는 선진적 협력체계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연구의 세부적인 내용까지 미리 알리고 동의받는 방식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연구 활동을 먼저 수행하고 나중에 알려주는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협상에서 언론과 여론의 관심은 온통 농축과 재처리에만 쏠려 있다. 실제 국가적으로 추진할 계획도 없는 추상적 개념에 매몰된 게 문제다. 실질적으로 과학자들의 현장 연구활동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게 무엇보다 시급하다. 자율적 원자력 연구개발 여건의 확보가 관념적 또는 명목상의 이슈보다 훨씬 중요하다. 원로 과학자의 당부에 귀를 기울일 때다.
양명승 < 前한국원자력연구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