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리스트는 선천적으로 겁이 없고 또 불우하게 자랐을 것이라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집단극단화’와 같은 사회적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아지트를 만들고 반대의견을 누르는 관행들이 쌓여간다. 전체의 승인이나 반대만 허용한다. 그러니 결론은 항상 ‘강경’이다. 정당이나 노동조합에서 자주 보는 계파라는 것도 바로 이런 극단화를 주도하는 집단이다.

당원 전체를 휘어잡는 리더십이 있으면 이런 소수 집단은 잘 생겨나지 않는다. 정당 내에 고만고만한 인물과 집단들만 있고 이들이 경쟁관계에 빠져들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지난 7·30 재보선에서 참패한 새정치민주연합이 딱 그런 모양새다. 계파로 뿔뿔이 흩어진 정당의 의사결정에선 다수결이 아니라 강경파가 주도한다. 소위 근본주의적 견해일수록 경쟁에서는 유리하다. 투쟁도 그렇다. 강경투쟁이야말로 분열된 계파들을 관통하는 공동전선을 형성해내기 쉽다. 식물의 성장을 좌우하는 것은 넘치는 요소가 아니라 가장 부족한 요소라는 ‘리비히의 법칙’을 사회학적으로 원용해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한 단체의 수준은 그 단체의 가장 낙후된 부문이 결정하는 것과 같다.

훌륭한 리더는 한 단체의 수준을 끌어올리지만 이것이 군소계파로 나눠지면 거꾸로 가게 된다. 새정치연합에는 친노계, 김한길계, 486그룹 등을 비롯해 옛 민주계 민평련 정세균계 박지원계 박원순계까지 있다고 한다. 당연히 안철수계도 있고, 손학규계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이 집단극단화 현상을 부추기며 서로 경쟁을 벌이게 되면 가장 저급한 내용의, 가장 강경한 투쟁노선이 담긴 당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지금 새정치연합이 빠져있는 함정이다. 이런 함정에 빠지는 것이 정당만은 아니다. 계파로 난립하는 노동조합 역시 같은 논리회로를 따라 강경투쟁을 벌인다. 현대자동차 노조가 딱 그렇다.

새정치연합이 불임정당이 되는 것은 반대자들도 원치 않는다. 민주정치는 정권의 평화로운 교체가능성을 본질로 한다. 그래서 한국의 유권자들, 특히 새정치연합의 지지자들은 불쌍하다. 그들은 지금 무망한 정당을 지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