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김정원 "슈베르트가 남긴 여백, 연주자 상상력으로 채우죠"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그의 명성에 비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21개 작품 가운데 후기 소나타 3곡을 비롯한 몇 곡만 연주되곤 한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이 피아니스트들에게 ‘신약성서’로 꼽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전곡을 음반으로 남긴 연주자도 라두 루푸, 알프레드 브렌델 등 손에 꼽을 정도다.

한국의 대표적 피아니스트 김정원 씨(39·사진)가 내달부터 이 대열에 합세한다. 김씨는 내달 31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공연을 시작으로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 및 연주회에 나선다. 3년에 걸친 대장정이다. 국내 피아니스트 가운데 첫 시도다.

최근 서울 평창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씨는 “개인적 인연에서 시작하게 된 프로젝트”라고 운을 뗐다. 김씨는 14세 때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을 떠났다. 난생 처음 가족과 떨어진 그에게 유럽의 겨울은 혹독했다. 그가 위로를 받았던 곳은 집 근처에 있던 슈베르트의 옛집이었다.

“내부를 요란하게 꾸미지 않고 그가 쓰던 피아노, 악보 등을 볼 수 있게 해놨어요. 아는 사람 하나 없던 낯선 도시에서 친숙한 음악가의 집이 옆에 있다는 게 위안이 됐죠. 가장 힘든 순간에 저를 위로해 준 작곡가가 슈베르트였어요. 제 나이가 올해 한국식으로 마흔인데,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오면서 피로가 쌓인 것 같아요. 슈베르트 전곡 연주를 통해 지친 몸을 깨우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다시 키워보려고 합니다.”

피아니스트 가운데 ‘기승전결이 불명확하다’는 이유 등으로 슈베르트 소나타를 기피하는 사람들도 많다. 김씨는 “지루한 예술영화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면서도 “원초적 자극은 없지만 생각할 수 있는 여백이 많다”고 설명했다.

“라흐마니노프처럼 악보대로만 연주하면 80%가량 완성되는 음악이 있어요. 하지만 같은 방법으로 슈베르트를 연주하면 20%도 완성되지 않아요. 연주자와 청중들의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600곡 이상 가곡을 썼던 만큼 화성과 선율도 매력적이고요.”

김씨는 내달 연주회를 시작으로 2016년까지 다섯 차례 공연을 열 계획이다. 21개 소나타를 전부 녹음하지만 무대에 올리는 곡은 15개 정도다. “무대에서 공연하기 부적절한 곡은 제외했다”는 설명이다. 대곡으로 손꼽히는 18~21번과 방랑자 환상곡을 각 공연 후반부에 메인 작품으로 배치하고 전반부에선 이와 잘 어울리는 작품을 두 개씩 연주한다. 첫 연주회에선 소나타 19번(D.958)과 5번(D.557), 13번(D.664)을 선보인다.

“19번은 후기 소나타 세 곡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이에요. C단조여서 베토벤 느낌도 많이 나죠. 5번은 19번과 배치되는 밝고 힘찬 작품이고 13번은 사랑스럽고 예쁜 곡이에요.”

고된 작업을 앞에 둔 그는 되레 설렌다고 했다. “21곡의 소나타 중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들어본 작품도 있어요. 다른 사람의 연주조차 안 듣고 악보로만 만나는 곡이죠. 현대음악을 빼면 이런 기회는 잘 없거든요. 일부러라도 남의 연주를 전혀 듣지 않고 악보로만 만나려고 해요. 음반을 남긴 뒤 후회하지 않도록 제가 원하는 최선의 해석과 연주를 할 겁니다.”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