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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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절이나 3·1절에도 안 다는 태극기를 현충일이라고 내걸겠어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분들의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추모하는 날이 아니라 그냥 노는 날이 됐잖아요.”

충남 예산에 있는 수당기념관을 지키는 이문원 관장(77·사진)은 5일 전화인터뷰에서 “날이 갈수록 현충일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 관장에게 현충일의 의미는 남다르다. 그는 어림잡아 150년을 이어온 독립운동가 집안의 자손이다.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고려 후기 문신 목은(牧隱) 이색의 19세손으로, 대한제국 때 항일 독립운동가였던 수당 이남규 선생이 그의 증조부다. 수당의 장남으로 수당과 함께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던 중 일경의 칼에 무참히 살해된 유재 이충구 선생과, 유재의 장남이며 이 관장의 부친인 평주 이승복 선생도 항일 독립운동가다. 수당에게는 1962년 독립장이 추서됐으며 유재는 1991년, 평주는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선산에 모셔졌던 이들 독립운동가 3대는 2010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됐다. 또 이 관장의 형 이장원 중위는 6·25 때 원산전투에서 전사해 국립 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그러니까 한 집안 4대가 현충원에 모셔진 것이다.

“수당 할아버지 직계 자손 장남 셋이 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것이죠. 3대가 독립운동을 한 집안은 현재 서너 곳 있지만 다 장손으로 이어진 예는 유일한 것 같아요.”

이 관장은 특히 수당 선생의 ‘정신’을 마음의 죽비로 간직하고 있다. 수당은 자신을 연행해 서울로 압송하려는 일경을 향해 “선비는 죽일 수 있으되 욕보일 수는 없다(士可殺不可辱)”고 꼿꼿한 자세로 호통을 쳐 많은 유생의 항일투쟁정신을 고취한 것으로 유명하다. 부친 평주 선생에 대한 기억도 그런 정신을 늘 붙들고 있게 한다.

“아버지는 13세 때 졸지에 고아가 됐고, 가장이 됐어요. 3년상을 마친 뒤 또 변을 당할까봐 서울로 피신해 활동했어요. 서대문 밖 여관방으로 찾아온 월남 이상재 선생도 만나셨다고 해요. 자연히 가족에겐 소홀할 수밖에요. 그래서 아버지 얼굴 볼 새도 없었네요. 시골집엔 일경이 수시로 찾아왔고요. 마음을 다잡고 공부할 생각을 안 했으면 아마 깡패가 됐을지도 모르겠어요.”

이 관장은 1968년부터 중앙대 교수로 재임하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 광복회 회보 편집위원 겸 논설위원, 한국교육철학회장 등을 지냈다. 2001년 9월부터 임기 3년의 제6대 독립기념관장으로 일했다.

이 관장은 한국 사회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서는 학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나라를 지킨 선조들 덕에 호강하며 산다는 점을 명심해야죠. 능력을 발휘해 국가에 이바지하자는 뜻의 개인주의가 아닌 자기자신만 아는 이기주의자를 키워서야 되겠어요? 아이들이 직접 현충원을 참배하도록 하고, 글짓기 행사 같은 것을 해서라도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어른들부터 솔선수범해야 하겠지요.”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