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국수가 먹고 싶다
봄바람에 편지 한 통이 실려 왔다. 이상국 시인의 편지였다. 편지에는 “시를 사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편지를 액자에 소중히 담아 사무실 책상 옆 벽에 걸어뒀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길거리에 나서면/고향 장거리 길로/소 팔고 돌아오듯/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국수가 먹고 싶다.’ 지난 2월 국회방송 ‘나의 애송시’에 출연해 낭송했던 이상국 시인의 ‘국수가 먹고 싶다’의 한 구절이다.

국수는 가난을 어깨에 지고 살았던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그 시절 왁자지껄한 장터 사이 길을 걷노라면 훈훈한 김이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국수에 눈길이 끌렸다. 허연 김과 함께 피어오르는 국숫발을 바라보면 국수가 한없이 먹고 싶었다. 주린 배를 든든하게 채워준 그때 국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삶의 위로였고 어떤 화려한 요리보다 달고 맛있었다. 형편이 나은 집에서 국수를 하는 날이면 동네 아이들은 신이 났다. 국수를 썰다 남은 조각인 ‘국수꼬리’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에나 사발은 있었다. 국수가 담긴 사발에는 결코 얕지 않은 삶의 깊이가 있었다. 하루 밥벌이를 마치고 이 소박한 먹을거리로 노곤한 마음을 축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웃는 아이들의 얼굴에서 정이 피어났다. 두런두런 모여 앉아 국수 한 그릇을 놓고 일상을 나눴다. 그 속에서 애환과 고달픔을 나누며 서로를 위로했다.

국수를 보면 ‘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한다’는 세종의 정치이념인 ‘여민동락(與民同樂)’이 생각난다.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그 마음이 세종으로 하여금 훈민정음을 창제케 했고, 백성과 함께 즐기자는 뜻의 음악인 ‘여민락(與民樂)’을 만들게 했다. 세종은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백성의 마음을 헤아렸다. 여민동락에 깃든 공감과 소통, 배려의 정신은 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세상의 뒤안길에는 울고 싶은 사람들,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국수 한 그릇 같은 정치를 펼쳐왔던가.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여민동락’ 신념을 되새기며 길을 나선다. 그리고 허름한 식당이면 어떻고 포장마차면 어떤가. 사람들의 살내음이 물씬 풍기는 그곳에 앉아 국수 한 그릇 후루룩 먹고 싶다.

이병석 < 국회 부의장 lbs@assembly.g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