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韓銀, 앙시앙 레짐을 걷어내라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중앙은행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낮추고, 비전통적 방법을 동원하면서까지 유동성을 풀어댔다. 전통을 뛰어넘는 비상대책들은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예상보다 무난하게 위기를 넘겼을 뿐 아니라, 위기의 근원이던 미국의 부동산 및 가계부채 버블도 빠른 속도로 제자리를 찾아갔다.

위기 발생 이후 6년여가 지난 지금, 비상대책들을 정상화시키는 작업이 시작되고 있다. 벤 버냉키에서 재닛 옐런으로 의장이 바뀐 미국 중앙은행(Fed)도 양적완화를 서서히 줄이고 있고, 금리인상은 시점의 선택만 남았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은행은 다른 중앙은행들처럼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너무 낮은 금리 수준을 너무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다. 그런 비정상적 저금리는 신임 이주열 총재의 재임기간 중 정상화될 가능성이 높다.

금리를 내리기는 쉬워도 올리기는 어렵다고 했던가? 유동성을 회수하는 과정에서는 생각지 못한 부작용들이 빚어질 위험이 많다. 게다가 미국과 달리 한국의 가계대출 및 부동산 버블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교정은커녕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 정책 성공을 위한 환경이 미국보다 훨씬 불리하다는 의미다. 이 총재와 옐런 의장 두 분의 역량이 서로 같다면 금리 정상화에 성공할 확률은 이 총재가 옐런 의장보다 낮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금리 정상화에 성공하려면 정확한 상황판단에 기초한 치밀한 사전대책이 필요하며, 대책 마련과 시행 및 조율에서 한은은 통화당국으로서의 정책 리더십을 유감없이 발휘해야 한다.

지난 20년을 돌아볼 때 한은은 선택의 고비마다 정책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 결과 우리 경제는 커다란 어려움에 빠지거나 경제 펀더멘털이 크게 악화되곤 했다. 세 가지 사례가 두드러진다. 첫째, 반도체 호황(1994~1995) 때 한은이 과감한 통화긴축으로 경기를 진정시켰더라면 경상수지 적자 축소 및 외환보유액 증가로 우리 경제는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겪지 않았거나, 겪더라도 완만하게 겪을 수 있었다. 둘째, 1998년 초 한은은 국제통화기금(IMF)에 콜금리가 지나치게 높아 우리 실정에 맞지 않음을 통화당국 자격으로 당당하게 지적하고 콜금리 인하를 강력하게 요구해야 했으나 한은의 그런 존재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셋째, 2001년 저금리 정책 이후 2002년부터는 금리를 조속히 정상화시켜야 했으나 거기에 실패함으로써 부동산 버블과 가계대출 버블이 위험 수준을 넘어 커졌을 뿐 아니라 가계 저축률이 전 세계 바닥 수준으로 하락해 우리 경제 펀더멘털이 크게 취약해졌다.

이는 지난 20년 동안 한은의 자화상이었다. 한은으로서는 억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과거 한국 통화정책 역사 속에는 한은이 독자적 정책 리더십을 발휘할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은의 독립성이 확보되지 않아 정부 및 정치권의 압력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이제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모든 국민들이 한은의 독립성 확보를 응원한다.

그러나 이브의 권유 때문이었다는 변명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죄를 사(赦)해 주지 못한 것처럼 정부와 정치권의 압력 때문이라는 변명도 한은의 책임을 면(免)해주지는 못한다.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이란 그렇게 냉정하다. 무엇 때문에 한은은 하고자 했던 대로 하지 못했나? 많은 이유들이 있었을 것이다. 알려진 이유와 숨겨진 이유, 그 내용이 무엇이건 그것들은 한은이 스스로 극복해야 할 앙시앙 레짐(구체제)을 형성한다. 이 앙시앙 레짐을 극복해야 한은은 금리 정상화에 성공할 수 있다.

박종규 <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jkpark@kif.re.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