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에 전시된 이용백의 영상작품 ‘자유로를 향하는 플라워탱크’. 중국작가 리웨이의 ‘29층의 자유’.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서울시립미술관에 전시된 이용백의 영상작품 ‘자유로를 향하는 플라워탱크’. 중국작가 리웨이의 ‘29층의 자유’.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중국 베이징의 고층빌딩 밖 허공에 한 남자가 부유하고 있다. 사람들은 추락 일보 직전의 그를 구하려고 손을 내민다. 중국 작가 리웨이의 작품 ‘29층에서의 자유’는 실존적 위기에 처한 중국 현대인의 삶을 상징한다. 자유롭게 날고 싶은 의지만큼이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 그를 다시 옥죄는 인습과 관계의 손들은 그를 견고한 건물 안으로 힘차게 끌어당긴다.

서울 서소문동(덕수궁길)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액체문명(Liquid Times)’전은 전통적 가치가 파괴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그것을 대체해 나가는 오늘의 동아시아 현실을 곱씹어 보는 전시다. 한국과 중국의 대표작가 12명이 참여하는 이번 전시는 베이징 송주앙미술관과 화이트박스미술관의 협력으로 이뤄지는 ‘한·중 현대미술전’이다.

전시 주제인 ‘액체문명’은 폴란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현대사회의 특성으로 규정한 ‘액체적 현대성(Liquid Modernity)’ 이론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견고함을 지닌 과거 체제를 녹이며 근대가 시작됐다고 한다. 액체성은 합리적이고 유연한 이성 사회의 건설을 겨냥한 것이지만 문제는 그것이 전통적인 윤리와 도덕, 인간적 유대, 저항정신마저 녹여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다원적 가치의 추구와 수평적인 관계를 만드는 가능성을 열어줬다고 봤다.

이번 전시는 그런 ‘액체 사회’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동아시아 예술가들의 고뇌를 보여준다. 왕칭쑹의 ‘팔로우(Follow) 연작’ 사진은 개방 이후 물밀 듯이 들어온 서구문명과 그 속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맹목적으로 쫓아가는 현대 중국인을 풍자하고 있다. 저마다 참고서의 탑을 쌓고 잠든 학생들을 통해 입시만능주의를 풍자한다.

흐릿한 초상 사진을 통해 현대인의 흐트러진 정체성을 표현하는 작품으로 잘 알려진 쉬융은 반체제 예술가 아이웨이웨이를 모델로 한 ‘페어리 테일’ 등 초상사진 20여점을 선보인다. 쑹둥은 폐자재를 조립해 만든 설치작품 ‘가난한 자의 지혜’를 통해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가치만을 추구하는 현대 중국인에게 무엇이 진정한 가치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미디어 아티스트 이용백은 2012년 플라워탱크를 제작해 운행한 퍼포먼스의 편집 영상인 ‘자유로를 향하는 플라워탱크’를 내놨다. 평화를 상징하는 꽃과 전쟁(폭력)을 상징하는 탱크가 결합된 플라워탱크를 통해 평화로 위장된 남북의 갈등을 암시하고 있다.

또 이원호는 걸인과 흥정해서 산 동냥 그릇 40여점을 전시해 구걸과 적선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걸인과 적선자를 대등한 관계의 맥락으로 복권시킨다.

선승혜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은 이번 전시가 “21세기 한국과 중국 사회가 외부 문화와 첨예하게 갈등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새로운 구심점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5월11일까지. (02)2124-8928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