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카드사들의 '50원짜리 사과'
“이럴 거면 대국민 사과니 기자회견이니 뭐하러 합니까?”

지난 8일 오후 서울 남대문로 대한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는 기자들이 기자회견을 여는 사람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KB국민·롯데·NH농협카드 등 3개 신용카드사와 신용평가업체 코리아크레딧뷰로(KCB) 경영진 4명이 기자회견장에서 사과문을 읽은 뒤 ‘질문은 받지 않겠다’며 황급히 퇴장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날 회견은 사상 최대인 1억400만건의 고객정보 유출사고가 터지자 급히 자청한 자리였다. 회견의 시점이나 참가자 면면을 볼 때 당연히 사고 발생 경위, 책임 소재, 향후 대책 등의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이날 회견은 ‘죄송하다. 자세히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말만 반복하다 15분 만에 알맹이 없이 끝났다.

기자들은 뒤이어 들려온 카드업계 관계자의 해명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사장님들이 검찰수사 결과 말고는 사건 경과를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말씀드릴 것이 없다”고 말했다. 사과의 진정성이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카드 회원 정보 유출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카드 회원 정보는 건당 50원짜리 공유 정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사고도 그렇지만 더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으며, 재수 없이 당했다’는 식의 카드사들 반응이다. 한국의 1일 카드 결제 건수는 3000만건 정도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보안의식은 ‘신용카드 강국’의 위상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금융당국의 태도도 문제다. 사고의 배경이 된 카드사들의 전산프로그램 개발은 금융당국의 지도에 따른 것이다. 개발 과정에서 사고의 개연성이 있는 외부 용역업체들이 참여하는데도 관리감독 조치가 소홀했다. 솜방망이 처벌도 유사사건이 이어지는 배경이다. 그간의 개인정보 유출건에 대해 당국은 기관주의, 과태료 부과, 감봉 등의 경징계에 그쳤다.

이번 사고로 카드사들은 신뢰에 치명타를 입었다. 소비자들의 불안감은 더 커졌다. 카드 사용자들이 바라는 건 비난을 일시적으로 피하기 위한 사과가 아니라, 적극적인 피해 복구와 재발 방지일 것이다.

임기훈 금융부 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