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무의 ‘추강대도도’ (14세기)
성무의 ‘추강대도도’ (14세기)
가을바람이 소스라니 부는 어느 날 오후 두 사람이 강변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다. 배는 이미 떠난 지 오래. 손바닥보다도 작아졌다. 배가 건너편 강안의 사람을 싣고 돌아오려면 한 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하리라. 선비는 가부좌를 틀고 풀밭에 앉았고 시중드는 아이는 지루한 얼굴로 떠나간 배를 바라본다.

원나라 말기의 화가 성무(盛懋·14세기 활동)가 그린 ‘추강대도도(秋江待渡圖)’는 동아시아의 전형적인 산수화다. 서양으로 치면 풍경화에 해당하는 장르다. 그러나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가지 납득하기 어려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시점이 여러 개라는 점이다. 그림은 관찰자(곧 화가)가 하나의 단일한 시점에 입각해 그려야만 한다는 학교의 가르침과 다르다. 베네치아의 풍경화가 카날레토가 그린 ‘대운하와 살루테 교회’는 하나의 고정된 시점에 입각해 그린 전형적인 예다.

그렇지만 ‘추강대도도’에는 두 개의 시점이 공존한다. 우선 배를 기다리는 선비와 시동이 자리한 그림의 앞부분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그린 것이다. 그러나 수면 위로 멀찍이 보이는 산들은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화가가 투시법을 잘 몰랐거나 투시법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게 그린 것일까. 아니다. 동양의 산수화에는 서양의 풍경화와는 전혀 다른 조형방식이 작동하고 있다.
카날레토의 ‘대운하와 살루테교회’ (1730)
카날레토의 ‘대운하와 살루테교회’ (1730)
서양의 풍경화는 그림 밖에서 마치 창밖 풍경을 바라보듯 감상하는 그림이다. 반면에 동아시아의 산수화는 그림 안으로 들어가 감상하는 그림이다. 이 점은 산수화의 발생배경을 알면 곧 이해될 것이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종병(宗炳·375~443)이라는 은둔자는 평소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심신을 수양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산에 오를 수 없게 되자 산수화를 그려 누워서 마음으로 유람했는데 이를 ‘와유(臥遊)’라고 한다.

산수화는 일종의 가상현실이다. 감상자는 그림 속의 산과 강을 마음으로 유람한다. 유람하는 데는 당연히 일정한 시간이 소요되기 마련이다. 오늘의 관객은 ‘추강대도도’를 감상하는 데 5분도 안 걸리지만 옛사람들은 이 그림 한 장을 보며 몇 시간 동안 마음 여행을 즐겼다.

감상자의 마음 여행은 배를 기다리는 선비와 시중드는 아이가 자리한 그림 아래쪽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광경을 한눈에 파악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점이 적절하다. 선비에 감정을 이입한 감상자는 한 시간 후에 시중드는 아이와 함께 배에 오를 것이다. 그는 배 위에서 저 멀리 펼쳐진 아름다운 산들을 바라보리라. 이때 눈에 비친 산은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묘사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감상자는 아마도 건너편 강안에 도착하고 나서 그 산으로 여행을 계속할지도 모른다. 감상자는 계속해서 자리를 옮겨야 하므로 서양 풍경화에서와 같은 단일한 시점은 존재할 수 없다.

‘추강대도도’는 겉보기에 하나의 정지된 풍경화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만만치 않은 시간의 흐름이 존재한다. 다양한 시점의 공존은 바로 그런 여정을 위한 배려인 것이다.

[CEO를 위한 미술산책] 산수화는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는 그림… 서양화와 감상법 달라
아직도 많은 감상자들이 박물관에 걸린 산수화를 보며 투시법을 망각한 엉터리그림이라고 손가락질한다. 이제 그게 얼마나 잘못된 감상법인지 알수 있을 것이다. 동서양의 풍경화는 완전히 다른 예술전통에서 비롯됐다. 그림이야말로 그런 차이점을 푸는 열쇠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