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불황에다 '규제 허들'까지 높아지면서 유통업계는 날마다 울상입니다. 1인가구가 급증하는 '솔로이코노미 시대'가 도래했고 합리적인 소비로 자체 브랜드(PL·PB) 개발도 봇물을 이룹니다. 진열대와 TV, 온라인·모바일 구분없이 오늘날 판매경쟁은 손바닥 위에서도 치열합니다. '21세기 베니스의 상인'으로 불리는 MD(merchandiser)의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꾸준한 영업력이 곧바로 유통채널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불멸의 '맨파워'로 쓰러져가는 유통기업까지 일으켜 세운 MD의 밤낮 없는 활약상을 생생히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편집자 주>
[트렌드메이커 MD의세계⑥]'화장품 바르는 남자' 위메프 박태순 MD의 흥행 비법 …"꿈을 팔아라"
[ 노정동 기자 ] 박태순 위메프 뷰티MD 팀장(31·사진)은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홀로 떠난 미국 유학생활은 과감한 도전이자 결단이었다. 제대로 된 비즈니스를 해보고는 것이 목표였다.

다만 그의 꿈은 구체적이지 못했다. 미국 땅을 밟은 지 10년 만에 짐을 싸고 귀국했지만 배운점도 많았다. 미국에서 대형슈퍼 사업을 벌인 그는 10년 동안 매대 정리부터 가게 운영까지 직접 챙겼다. 상품을 구매하고 진열하고 재고정리까지 맡아 공급자와 소비자의 심리를 동시에 엿볼 수 있는 값진 '감각'을 키운 것이다.

장사꾼과 소비자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감각' 하나로 2011년 8월, 곧바로 소셜커머스(전자상거래) 위메프 뷰티팀에 합류한 박 팀장은 저렴하지만 명품 브랜드 이상의 품질을 자랑하는 핸드크림을 골라와 20·30대 여성 소비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를 찾는 화장품 제조사들도 줄을 이었다.

2011년 이후 3년 가까이 박 팀장이 론칭한 화장품의 가격은 곧 업계의 표준이 됐고, 단번에 '벼락 MD'로 자리를 잡아나갔다. 승진은 덤이다. 초보MD에서 입사 2년 만에 위메프 뷰티팀을 이끄는 팀장급 MD로 초고속 승진을 했다. 위메프 설립 이래 유례가 없는 승진 속도다.

"뷰티 상품은 고객들에게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꿈을 파는 것과 같다"며 MD로서의 자신의 철학을 밝힌 그를 서울 삼성동 위메프 본사에서 만났다. 여자보다 더 화장품을 많이 바르는 남자의 이야기다.

◆ 혈혈단신(孑孑單身) 美 유학…슈퍼마켓 사업 통해 '고객' 공부

박 팀장은 학창시절부터 미국에서 사업을 해야겠다는 꿈을 꿨다고 한다. 월마트 처럼 미국을 선도하는 거대 기업에 매력을 느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유통에 관련된 비즈니스를 해보자'는 것이 그의 첫번째 목표였다. 때마침 미국에는 그의 친척이 살고 있었다.

"부모님을 설득한 끝에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미국 유학 길에 올랐어요. 유통 기업에 관심이 많아 경영학 공부를 우선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모님은 대신 조건을 달았어요. 유학생활 중 필요한 생활비는 제 스스로 해결하라는 것이었죠."

경영학 중 '사람'을 관리하는 데 관심이 많아 인적자원관리학(HR Management)을 택한 그는 캠퍼스 밖에서 실전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슈퍼마켓 사업을 시작했다. 박 팀장은 현장에서 직접 부딪치는 것부터가 기업 경영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자금을 갖고 있던 지인과 함께 슈퍼마켓을 론칭하는 작업부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가게를 오픈하는 것만 도와주다가 직접 사업에 뛰어들게 됐죠. 청소하는 것부터 물건을 주문하는 것까지 직접 다 제 손으로 했습니다."

그는 사업에 치중하면서 공부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가 고민도 했지만 자신이 직접 주문하고 매대에 올려 놓은 물건이 하나도 남김 없이 팔려나갔을 때의 보람이 컸다고 했다.

"슈퍼 한 곳에서 파는 물건의 종류만 해도 400여 가지가 넘어요. 이 많은 종류의 상품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부터 어떻게 팔 것인가에 대한 아이디어를 짜내는 과정들이 재밌었습니다. 특히 자주 방문하는 고객들을 분석해 연령, 선호제품, 동선 등을 반영해서 더 좋은 결과를 이끌어냈을 때의 희열은 잊을 수가 없었죠."

미국에서 경영학 공부를 끝내고 직장을 구하던 그는 우연치 않은 기회에 국내에서 급성장 중이던 소셜커머스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됐다. 이미 미국에선 온라인 기반의 유통 채널이 전성기를 맞고 있던 터라 박 팀장에게 전자상거래 회사는 낯설지 않았다.

"제 인생의 방향을 바꾼 결정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이뤄놓은 결과물 없이 국내로 복귀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어요. 위메프에서 MD로 일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 뿌리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MD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 업계 핸드크림 가격 3300원으로 통일시킨 '힘'…"가격 거품 빼고 제품력으로 승부"

2011년 박 팀장이 어시스턴트MD로 입사했을 때 위메프의 뷰티팀 매출은 경쟁사 대비 절반 수준에 그쳐 있었다. 20~30대 여성이 주요 소비자층인 소셜커머스에서 이미용 상품의 매출 비중은 상대적으로 높은 것이 보통이었지만 오히려 위메프의 상황은 반대였다. 그만큼 위메프 뷰티 카테고리의 매출은 저조했다.

"더이상 떨어질 곳이 없을 정도로 이미용 부문의 매출이 부진한 상태였습니다. 상품 종류로 밀어부치기 보다는 소비자들의 기억에 남을 만한 '잇(it)' 아이템이 필요했어요. 수십 차례 협력사들을 쫓아다닌 끝에 찾아낸 게 바로 핸드크림이에요."

박 팀장이 핸드크림에 집중한 이유는 가격 때문이다. 다른 화장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가인 핸드크림은 만져보지 않고 구매해야하는 온라인 유통 채널의 특성상 더 적합한 상품이라는 판단에서다.

"당시 20~30대 여성들 사이에서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던 모 유명 브랜드 제품이 있었어요. 제 생각에는 품질 대비 가격이 비싸다고 생각했죠. 브랜드 로열티를 없애고 유통 마진을 줄인다면 훨씬 더 나은 품질의 제품을 더 낮은 가격에 공급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화장품 사용에 민감한 여성 고객들은 품질과 가격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제품을 먼저 알아봤다. 당시 백화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던 모 유명 브랜드의 핸드크림보다 보습력을 5% 높였지만 가격은 4분의 1로 떨어뜨린 이 제품은 딜 개시 3일 만에 준비한 분량 1만 개가 모두 팔려나갔다.

"핸드크림이 불티나게 팔리는 것을 보고 협력사 사장님이 수고했다고 말해주셨을 때가 가장 뿌듯했던 것 같아요. 'MD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바로 그럴 때죠. 이후 경쟁사에서 유사 상품들이 줄지어 쏟아졌어요. 가격은 저희가 출시했던 3300원이 기준이 됐습니다."
[트렌드메이커 MD의세계⑥]'화장품 바르는 남자' 위메프 박태순 MD의 흥행 비법 …"꿈을 팔아라"
이뿐만이 아니다. 다 쓰러져가던 중소기업을 벌떡 일으켜세운 것도 모자라 해외수출까지 성공시킨 것도 박 팀장의 기획력 때문이었다.

"홈쇼핑에 운동기구를 납품하던 협력사가 있었는데 그 회사 사장님께서 매출 부진을 이유로 업종을 화장품으로 바꾼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때마침 저희도 자체 상품을 개발 중이었던 터라 협업(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여성 청결제를 개발했습니다. 여성 속옷에 한 방울 떨어뜨리면 위생에 도움을 주는 보조 상품이었죠."

박 팀장은 이 여성청결제 상품을 론칭하기 전 이미 성공을 예감했다. 고객들의 수요에 비해 관련 상품이 부족한 '블루오션'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여성청결제는 출시부터 지금까지 위메프 뷰티 카테고리 상위권에서 빠지지 않는 제품이 됐어요. 현재 협력사는 이 상품을 통해 연간 10억 원 규모의 수출도 진행 중입니다. 자체 개발 상품이 해외수출까지 한 사례는 아마 업계 최초일 거예요."

◆ PB 화장품 론칭…"남들이 가지 않은 길 가는게 MD의 숙명"

박 팀장은 이른바 '대박' 상품을 만들어낸 공식으로 제품력, 가격, 후기 등을 꼽았다. 이렇다 할 특별할 것이 없는 대답이었다.

"대박 상품도 중요하지만 수익률을 높게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어요. 소셜커머스 업계는 가격경쟁이 상대적으로 치열하기 때문에 마진을 많이 남기는 것이 절대 절명의 과제입니다. 수익률을 조금이라도 더 올리기 위해 PB(Private Brand·자체 브랜드) 화장품 개발에 매달린 거예요."

위메프는 지난해 소셜커머스 업계 최초로 PB 화장품인 'W.뷰티' 시리즈를 선보였다. '이지함 남극크림'은 네 차례에 걸쳐 총 4만 개가, 메리뮤 트리트먼트는 다섯 차례에 걸쳐 총 1만1000개가 팔려나갔다.

위메프 뷰티팀의 팀장이자 유일한 남자 팀원인 그는 회사 내에서 '여자들보다 화장품을 더 많이 바르는 남자'로 통한다. PB상품의 성공적인 안착도 박 팀장의 이 같은 집념 때문이라는 게 회사 내의 평가다.

"화장품을 많이 바르는 이유는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궁금하기 때문이에요. 어떤 부분이 부족하고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 직접 체험해봐야 알 수 있거든요. 특히 남자인 제가 여성 소비자들까지 만족시키려면 그들보다 두 배 세 배는 더 경험해봐야 감당할 수 있는 거죠."

미국 유학생활 끝에 우연치 않게 MD의 세계로 들어선 박 팀장은 "항상 남들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이 MD로서 가장 어려운 일"임을 강조했다.

"가장 단기적인 목표는 위메프 PB제품을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소비자들까지 사용할 수 있게 수출하는 것입니다. 아직 소셜커머스 업계에서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고요. MD가 된 이상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개척해 소비자들에게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제품을 선보이는 것, 그것만큼 기쁜 일도 없을 거예요."

한경닷컴 노정동 기자 dong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