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Slumdog Millionaire)’는 200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등 8개 부문을 휩쓸며 최다 수상작의 영예를 차지했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흥행에 성공했다. 한국에선 110만명의 관객이 찾았다.

이 영화는 감동의 여운이 진한 휴먼 스토리에 인도의 경제 현실을 자연스럽게 녹여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라는 제목 그대로 인도 빈민가 소년의 성장스토리를 ‘누가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가’라는 이름의 인기 퀴즈쇼 속에서 풀어간다. 뭄바이 빈민가 출신인 18세 고아 자말(데브 파텔 분)은 퀴즈쇼에 나가 최종 라운드까지 진출하지만 그의 부정행위를 의심한 진행자의 신고로 경찰 조사를 받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난도 높은 퀴즈쇼의 문제 하나하나가 자말의 삶에서 잊을 수 없는 일들과 연관돼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주인공이 퀴즈의 정답을 어떻게 알게 됐느냐는 스토리가 영화의 중심축이라는 얘기다.

쓰레기장 vs 고층 아파트

자말의 어린 시절 배경은 1990년대 초반의 뭄바이다. 인도는 1991년 신경제정책을 채택해 대대적인 경제개혁과 개방을 단행했다. 고도 성장기의 출발이었다. 뭄바이 역시 이즈음 인도의 경제·금융 수도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인도는 여느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성장통을 앓았다. 자말의 어머니가 살해당하는 장면은 개발경제 시대에 접어든 국민적 갈등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990년대 초반 권력을 잡은 정치집단은 강경 힌두파 지역 정당 시브세나였다. 이들은 경제 개발을 앞세워 빈민가의 이슬람 신자들을 무자비하게 몰아냈다. 자말이 “라마신이 오른손에 들고 있는 물건은 무엇인가”라는 퀴즈쇼의 문제를 맞힐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빈민가의 실상을 직접 봤기 때문이다.

고아가 된 자말과 그의 형 살림(마두르 미탈 분)이 힘겹게 살아가는 과정에도 경제 성장의 그늘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이들은 쓰레기 더미를 뒤져 쓸 만한 물건을 찾아 겨우 생활을 이어간다. 그들의 뒤로는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게 들어서고 있다.

로렌츠곡선의 기울기


들개처럼 도시의 뒷골목을 전전하다가 헤어진 두 형제(맨위 사진)는 2000년대 후반 뭄바이에서 다시 만난다. 그들은 고층 건물과 상권이 들어선 뭄바이의 시내를 보며 과거 빈민가를 회상한다. 도시 개발 과정에서 건설업체와 결탁한 조직폭력배의 일원이 된 살림은 ‘출세’의 상징인 선글라스를 끼고 “인도는 세계의 중심이 됐다”며 감격해 한다. 하지만 자말은 여전히 가난하다. 부유층이 늘긴 했지만 퀴즈쇼를 보기 위해 작은 TV 앞에 수십명의 아이들이 몰려드는 빈민가에서 살아간다. 영화는 인도 빈곤층의 고단한 삶이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에도 거의 치유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형제는 경제 양극화의 대척점에 서 있다.

지니계수는 사회의 소득 분배가 얼마나 불평등한지를 나타내는 수치다. 사회의 분배 상태를 나타내는 로렌츠곡선(Lorenz curve)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그래프1>에서 세로축은 전체 소득의 점유비율이다. 가로축은 가장 가난한 사람부터 순서대로 배열했을 때의 비율이다. 예를 들어 가로축의 20은 한 나라에서 소득이 가장 낮은 20%의 사람들이고 그 점에 연결된 곡선의 세로축은 하위 20% 사람들이 얻는 전체 소득의 비율을 뜻한다.

로렌츠곡선이 대각선이 되면 소득이 완전히 평등하게 분배된 상태를 의미한다. 만약 수직으로 선다면 한 사람이 모든 소득을 독점하고 있는 상태다. 대개 로렌츠곡선은 <그래프1>처럼 대각선 아래로 처져 있다. 소득 상위 계층의 소득점유율이 인구 비율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다.

지니계수는 바로 대각선과 로렌츠곡선 사이에 만들어진 초승달 모양의 면적(A)을 대각선 아래의 삼각형 면적(A+B)으로 나눈 비율과 값이 같다. 로렌츠곡선이 대각선과 일치하면 지수는 0이 된다. 반면 로렌츠곡선이 수직을 이루면 지수는 1이 된다. 지니계수는 이렇게 0~1 사이에 위치하며,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한 분배 상태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0.4 이상을 불평등한 수준으로 본다.

지니계수의 함정


세계은행은 올해 인도의 빈민인구를 약 4억명으로 추정했다. 인도 인구가 12억명인 점을 감안하면 국민 중 3분의 1은 아직 자말과 같은 빈곤층에 해당한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인도의 지니계수는 2010년 이후 0.3~0.35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지니계수 0.4를 불평등한 것으로 보면 인도의 지니계수는 그다지 높은 수준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지니계수가 갖는 함정이 숨어있다. 인도 정부는 지니계수를 소득이 아니라 ‘소비 수준’을 기준으로 측정한다(→불평등 지수가 높지 않다고 주장하는 인도 정부의 '속임수'). 얼마를 버느냐가 아니라 얼마를 쓰느냐로 계층 간 경제력 차이를 재는 것이다. 인도가 이를 앞세워 자국의 불평등 지수가 그다지 높지 않다고 주장하자 보다 못한 세계은행이 소득 기준으로 재측정하게 된다. 그 결과는 0.54. 양극화 정도가 훨씬 심해졌다.

자말의 승리는 판타지일까

자말의 어려운 성장 환경은 퀴즈쇼에서 승리의 원동력이 된다. 그는 6억원의 상금을 받고 인도에서 슈퍼스타가 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단지 영화 속 이야기니까’라며 평가절하한다. 헛된 꿈을 꾸지 말라는 감독의 의도였을까.

사실 퀴즈쇼에서 우승해 인생에서도 ‘역전타’를 날린다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 정부는 빈민층을 구제하기 위해 다양한 소득 재분배 정책을 구사한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부(負)의 소득세제’다. 부유한 사람일수록 더 높은 세율의 세금을 내는 누진세의 단점을 보완한 제도다. 누진세는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을 더 크게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부의 소득세제는 소득이 줄어들수록 세율이 점차 낮아지다가 나중에는 음(-)의 값이 될 수도 있다. <그래프2>에서 볼 수 있듯이 50만원 미만의 소득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버는 돈 외에 보조금을 받아 최종 수입이 늘어나게 된다. 정부가 빈곤층에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해주는 제도다. 그래프에서 소득이 0인 사람도 보조금을 통해 20만원을 받게 된다. 따라서 보조금을 받는 빈민층의 처분가능소득은 ‘보조금을 받지 않으면서 스스로 번 돈이 50만원인 사람’의 처분가능소득까지 낮은 기울기로 접근한다.

하지만 이런 사회복지제도에 대한 비판도 있다. 재분배정책으로 인해 국민이 정부 지원금만 쳐다보는 ‘복지병’에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근로의욕을 해치지 않으면서 교육훈련 등을 통해 스스로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영화 개봉 2년 뒤인 2011년, 인도에는 자말과 같은 남성이 실제로 나타났다. 빈민가 출신의 한 남성이 인기 퀴즈쇼에 출연해 우승 상금으로 5000만루피(약 11억2000만원)를 받은 것. 그의 한 달 월급은 15만원에 불과했다. 이 남성은 이웃집에서 퀴즈쇼를 보며 문제를 풀었고, 꾸준히 공부했다고 했다. 그에게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판타지가 아닌 현실이었던 셈이다.

김태호 기자 highkick@hankyung.com